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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4의 게시물 표시

걱정 없는 삶

"신부님 걱정 없이 살려면 우짜마 됩니까?" 본당 신자분이 한탄하듯 하신 질문입니다. 답변을 드렸습니다. "어떤 걱정이냐에 달렸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걱정이냐에 달렸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그날 그날의 염려를 실제로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 하에 있는 일들이고 우리가 마땅히 신경써야 하는 일입니다. 사제가 신자들을 돌보는 일이나 아버지가 자녀들을 돌보는 일은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끌어안고 고심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있는 걱정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안에서 살아가게 되고 그분의 은총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사라지는 걱정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원'에 대한 걱정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에서 해방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자기 홀로 준비해야 하고 그런 가운데 큰 실패를 하는 사람이 겪게 되는 좌절이 있다면, 언제나 든든히 뒤를 봐 주는 부모님이 계신 가운데 이런 저런 시도들을 실패하는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언제라도 마지막 목적지를 뚜렷이 가지고 있는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 자기 홀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극도의 신경질적인 경계심 속에서 살아가야 하겠지요. 사실 하느님과의 유대관계가 없는 사람은 영혼이 메마른 사람입니다. 영원하신 분과의 친교가 없기에 그는 애써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하지만 결국 체험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는 체험 뿐입니다. 반면 하느님에게 신뢰를 두는 사람은 온 세상이 자신을 배신해도 최후의 신뢰처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마시려는 잔

누구든 바람직한 뜻을 품고 자신이 하려는 일을 할 때 모든 것이 그 일을 도와 순풍이 불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신이 가려는 여정에 반하는 힘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영적인 여정도 마찬가지라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마냥 순탄하고 좋기만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분별하면서 그것이 당장 나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피상적인 면을 살펴봅니다. 예를 들어 사제직이라는 것을 바라볼 때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처음부터 파악해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좀 있어 보인다던지 신부님이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다던지 하는 식의 관찰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막상 사제가 되고 나면 '이런 일도 겪어야 하나' 싶은 여러가지 현실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루 하루 스스로 결정해 나가야 하는 삶이 죽는 날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오늘 1독서에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겪는 고충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예언자였고 말씀을 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도리어 그런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공격하여 명예를 실추시키고 실질적인 손해를 야기시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정작 예레미야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복을 빌어 주고 하느님의 분노를 돌리고자 애를 씁니다. 화답송 안에서도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답송의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방에 둘러싸여 자신을 반대하여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모략 앞에 놓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미숙한 이해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뭔가 좋은 것이 있으리라는 단순한 생각 속에 그 아들에게 영광된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마실 잔의 성격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첫째가는 자리에 머무르는 지배하는 왕이

악행을 멈춰라

좋다고 느끼는 것과 좋은 것, 싫다고 느끼는 것과 싫은 것은 사실 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예를 들어 볼까요? 정의는 정의가 없어서 시달린 이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정의롭지 않게 자신의 이득을 추구해 온 사람에게는 두렵고 꺼려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가치들이 비슷합니다. 좋은 것이 모두 좋게 느껴지는 법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그릇되이 실행하고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로 인해서 진정으로 좋은 것은 우리에게 힘겹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순이 싫은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사순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싫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세속의 삶에 익숙해져 있는 가운데 영적인 가치로 방향을 돌이키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힘겹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세속 안에서 지쳐가고 하느님의 손길이 아쉬웠던 이들에게 이 사순이라는 시기는 훌륭한 영적 피정의 시기가 됩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악한 행실'을 치워 버리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치워내야 할 악한 행실을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것을 오히려 악한 것으로 분류해서 우리에게서 치워 버리려고 시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의 예를 듭니다. 진정으로 거룩해지는 것과 사람들 앞에 거룩해 보이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해지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거룩해 보이기 위해서 애써서는 안됩니다. 참된 거룩함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뜻하는 바를 알아서 그것을 스스로 구체적인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거룩한 이는 주변에서 다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속에 하느님의 향기가 풍겨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룩해 보이기만 하는 사람은 위선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선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자신이 세속적으로 추구하던 것들을 더 쉽게 얻을 수 있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모르는 사람 두 사람이 모인다고 앎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것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우리의 지혜를 통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찾아나갈 수 있고 새로운 지식을 축적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식은 영적인 분에게서 답을 구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여러가지가 공존합니다. 인간적 영역과 신적인 영역이 함께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영역은 우리 상호간의 노력으로 키워나갈 수 있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역사를 거쳐오면서 교회 안의 많은 것들이 발달해 왔습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지내는 건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시작부터 우리가 지닌 여러가지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시대를 통해서 서서히 형성시켜 온 것이고 또 앞으로도 변화되어 갈 것들입니다. 하지만 '신적인 영역'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변모와 같은 사건은 우리가 만들어 낸 무언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교를 '계시 종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체계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이신 것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요한 것을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반드시 '기도생활'이 뒤따라야 합니다. 인간적인 선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하느님과의 유대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활동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초월성을 근간으로 합니다. 기도는 인간적인 이유로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것들은 인간들의 수준에서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지닌 초월성을 바탕으로 하고 하느님과의 유대관계를 맺도록 돕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염경, 묵상, 관상 등등 여러가지 종류의 기도가 존재합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우리는 물건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100만원짜리 물건을 팔고 있는데 50만원을 들고 가면 절대로 그 물건을 살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반대로 1000만원, 아니 1억원이 있으면 100만원짜리 물건은 쉽게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능력있고 고귀하고 값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덜한 것을 성취하고 해결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영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내와 겸손과 온유와 자비와 같은 내적 역량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용서하지도 못하고 쉽게 뉘우치지도 못하며 용기있게 나서지도 못하고 인내로이 견딜 줄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순전히 우리의 능력만으로 세상을 마주하려고 하면 불가능해지는 것이 많아집니다. 특히나 어둠의 세력은 인간을 공격해 들어옵니다. 그 어둠의 세력에는 악한 영들이 있고 그 영들에게 사로잡힌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과 마주할 때에 우리는 곧잘 맞설 힘을 상실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들의 힘은 만만치 않게 강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강하기도 합니다. 악한 이들은 더욱 의욕적으로 강하게 악을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악을 실행하는 이들이 훨씬 더 영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하고 동시에 순진한 이들은 그들 앞에서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자리가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수하게 우리의 힘만으로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편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머지 자신의 친아들 마저도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그 크신 사랑, 무한한 사랑에 의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조직 폭력배들이 자신의 배후 세력에 기대어 제멋대로 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

예, 여기 있습니다.

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앞에서 '예'라는 긍정의 응답은 순명을 의미합니다. 불러도 얼마든지 모르는 척 할 수도 있고 무턱대고 도망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들에게서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라는 성소에의 부르심에 곧바로 네 하고 응답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 여기는 지금 부르심이 일어나는 자리를 말합니다. 가끔 우리는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느냐는 핀잔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정신이 지금 현재를 올바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지금의 나 자신과 나의 상태를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하며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의미하는 '여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며, '여기'야 말로 우리가 살아있고 무언가를 실행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인 지금에 충실해야 합니다. 있습니다 허영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풀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허영심에 빠진 이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그것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데 수준에도 맞지 않는 것을 취하려고 합니다. 또 자신이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없는 것 취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무언가를 할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 애써 그것을 없는 것으로 취급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솔직한 우리 스스로를 파악하고 그것을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그 봉헌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부르심에 긍정해야 하고, 그 자리와 순간에 실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그래서 사제 서품식에서 서품 후보자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에 이와 같이 응답합니다. "예,

마지막 한 닢을 갚기 전에는

오늘 복음을 순진하게 읽고는 잘못 이해하면 '싸우지 말라는 말이구나. 어떻게든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구나.'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성인들도 심지어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적대자들 박해자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헌데 당신을 원망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복음 선포하기를 멈추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들 앞에 자신이 의도하지도 않은 죄를 뉘우치며 '화를 풀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죄악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일에 헌신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는 자신 안에 그릇된 방향이 형성되어 가는 이에 대한 주의가 들어 있습니다. 나의 오류와 잘못으로 인해서 나를 향해 생겨나게 된 타인의 원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내가 나서서 그 앞에 잘못을 고백하고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릇되이 행한 데에서 형성된 원망이기에 그 실마리가 나에게 있는 것이지요. 먼저 다른 누군가의 원한을 야기시키는 나의 죄악이 멈춰야 합니다. 바보와 멍청이라는 것도 같은 노선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바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최고의회에 넘겨지지는 않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스스로를 일컬어 '바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단어를 다른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바보로 불러서 그의 명예를 침해하고 나의 악한 의도를 그에게 덮씌우려고 할 때에 '최고 의회'에 넘겨지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멍청이'라고 불러서 그가 하려는 좋은 일을 파묻어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부정적인 시야를 갖게 하려고 노력할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에제 18,25)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선을 '늘 착해 보임'과 착각을 해서 하느님이 늘 착해 보여야 하는 분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는 큰 착각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공정과 정의를 잘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으며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마치 복잡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합니다. 선을 행하는 이는 행복 안에서 살고 악을 저지르는 이는 순식간에 처단되어 사라져 버렸으면 참으로 단순하고 좋겠건만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의 이런 기대와는 달리 선을 행하는 이들이 도리어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반대로 악을 행하는 이들이 더욱 성공해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1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노선을 명백히 밝혀 줍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에제 18,26-27)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다고 하고 선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세상에는 악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선하지 않거나, 아니면 선하신데 전능하지 않아서 악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아닌가?" 우리는 완전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로서는 '완전'은 딱딱히 굳어져서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더이상은 손댈 이유가 없는 상태를 '완전'이라고 개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살아있음은 움직임을 전제로 합니다. 그

유일한 표징

  세상에는 수많은 소식,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폭발적인 정보사회에서 우리는 소식을 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정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소식들이 밍밍해 집니다. 마치 향수를 원액 그대로 사용한다면 엄청 진하고 소중하게 여겨지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물이나 알코올과 섞어 버리면 그 향이 있으나 마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고귀한 것과 하찮은 것이 구분이 잘 되었습니다. 하찮은 것은 우리가 일상의 영역에서 가볍게 다룰 수 있었고 고귀한 것은 비싼 돈을 들여야 겨우 배우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영적인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은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과거 사제직이 귀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영적인 이유보다도 배움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귀한 것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하찮게 다루어집니다. 따로 귀한 것과 하찮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넘쳐 흐르다보니 세상에서 떠도는 뜬소문이나 신앙의 진중한 가르침이나 구분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구약에 나오는 ‘요나’ 예언자의 활동은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선포했고 사람들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요나조차도 선포하기를 거부했던 메세지였지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피할 수 없는 체험(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는 체험)으로 인해서 결국 선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는 사람들에게 가 닿자 마치 촉매가 작용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니네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회개를 일으켰습니다. 헌데 요나가 외치는 것이나 오늘날 교회가 외치는 것이나 본질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는 말은 그 핵심에 있어서 ’한정된 기간이 흐르고 나면 멸망이 다가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마쳐지는 날,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멸망이 들이닥친다는 말이고 회개하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말과 의미, 그리고 의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그런 종류의 소리를 낸다면 그것을 ‘말’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땡똥띵똥 짱꽁캉’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말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말에는 의미가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은 하나의 그릇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기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릇이 조금 부족해도 그 안에 담긴 것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자신이 파견된 곳의 언어를 열심히 익히려고 하지만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말이, 언어가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말이 안되면 몸짓 발짓을 해서라도 의미를 관철시키게 됩니다. 의미 안에는 의도가 담깁니다. 같은 의미의 말이라도 의도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도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그를 칭찬할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를 은근히 비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의도를 영혼을 통해서 갖추고 있고 드러냅니다. 영혼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의도를 드러내고 영혼이 악한 사람은 악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파괴적인 사람이 있고, 반대로 겉은 거칠어도 생명을 주고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환자가 아파한다고 의사가 메스를 갖다대기를 거부한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병세가 악화되어 그를 죽여 버릴 것입니다. 그때 의사는 단호해야 하고 때로는 과감해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식별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외적으로 따뜻함을 드러내는 이들의 안에 숨겨진 것을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달콤한 껍질 속에 감춰진 독을 먹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입니다. 하느님은 악을 모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모든 말씀과 업적은 선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부드럽게 다가오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부드러움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선을 올바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굳건함과 용기, 성실함과 책임감이 오히려 더 요구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

마르코 복음 1장의 각 표상들에 대한 해설

광야 광야는 메마른 곳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이 제한 된 곳입니다. 모자라고 부족하고 힘겨운 곳입니다. 헌데 그곳으로 보내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언뜻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힘겨움이 사라져야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오히려 우리를 광야로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인도자는 식별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를 광야로 보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그것을 극복해 낼 충분한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께서 우리의 뒤를 봐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그러한 믿음이 성장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십 일의 사탄의 유혹 사탄의 유혹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정된 기간 동안 이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통제 하에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생애 자체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정된 기간 동안 이어지는 것이고 악은 허락된 영역 이상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유혹'이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내부의 동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의 선택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내면이 동의하면 유혹에 걸린 것이고 내면이 동의하지 않으면 유혹을 극복한 사람이 됩니다.  들짐승과 천사 하느님의 가 닿지 않은 인간을 성경은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영원의 뜻을 품지 않은 세속성에 머무른 이들은 사실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머무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한 편,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고귀한 것의 가치를 이해하는 존재는 사실상 천사입니다. 천사는 특별한 존재들이기보다 그 역할과 직무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사처럼 사는 사람은 사실상 천사인 셈입니다. 천사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를 닮은 이들을 알아보고 기꺼이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반대로 악마와 같은 사람, 사탄과 같은 사람은 유혹을 통해 상대를 죄악에 빠뜨리려 합니다. 하느님의 복음 사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기쁜 소식은 사람마

초월에 가 닿다

모든 이가 신앙에 같은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서 다가올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처음부터 필요한 수준을 갖추고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마음을 다해 애쓰는 만큼 학교에서 준비된 여러가지 과정들을 습득하고 졸업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신앙으로 다가와서 저마다 애쓰는 만큼 신앙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전하려고 하는 바를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고 배워 나가며 실천해야 합니다. 그분은 단순히 방향만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 길을 먼저 걸으셨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신앙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세례'라는 고귀한 성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세례의 본질은 몸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사건을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이 바른 양심은 단순히 올곧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초자연적인 일, 바로 부활이 전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바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이성적 판단으로 우리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는 양심에 따라 식별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그 범주를 넘어서서 '영원'에 가 닿아야 합니다. 영원이라는 색다른 시야를 지니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일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의 본질적 차원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언가를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다니기 싫은 직장에 다니는 것은 비록 싫지만 그곳을 다니면 '월급'이라는 되갚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세상 안에서의 거래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합니다. 심지어 자선과 희생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에 상응하는 세상의 되받음, 명예와 인기와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일까요?

세례 때에 우리가 물을 사용하는 이유는 물의 여러가지 내적 의미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은 그 파괴적 성향을 감추고 있습니다. 물에 빠지거나 큰 물난리를 겪어본 사람이면 물이 얼마나 위험하고 혼란스럽고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물은 그 내면의 파괴성으로 인해서 혼돈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사건에서 물은 바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물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파멸시켜 버리는 정화의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무턱대고 아무 이유 없이 파괴한 것이 아니라 인간 타락의 결과로 심판의 도구로 물을 사용하셨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약속, 계약이 주어집니다. 당신의 물의 심판을 통과한 존재들과 맺는 계약입니다. 그들에게는 다시 물이 홍수, 즉 혼돈과 파멸이 되어 덮치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은 이미 한차례 물이 휩쓸고 지나갔고 그 뒤에 맺어지는 계약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계약은 쌍방 약속입니다. 약속에 충실한 동안에는 지켜지지만 약속이 엇나갈 때에는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오늘 1독서를 잘 살펴보면 이것이 '세례'라는 행위의 비유적 표현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에 다가오면서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에게서 엇나간 것들이 1차로 씻겨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고 그분과 계약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동안에는 우리에게 파멸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계약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고 나면 세상에서 그 어떤 불운한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게 말하기엔 세상은 여전히 고통이 극심합니다. 심지어 물로 쓸어버리지 않겠다고 하고서는 쓰나미나 홍수와 같은 재앙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런 사건들을 계기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물이 홍수가 되어 파멸시키지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선한 이미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착해 보이고 싶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의미의 선함과 착해 보임을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1독서에는 '멍에를 부수어 버린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나는 혼인생활이 멍에였어. 오늘 성경 말씀에는 멍에를 부수어 버리라 하였지. 그러니 나는 이 결혼이라는 멍에를 부수어 버리고 이혼할거야. 나는 내가 사귀고 싶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사귀고 원하는 대로 술도 마시고 타락한 생활을 하고 싶어."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이것이 멍에를 부수어 버리라는 성경말씀의 본뜻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멍에를 부수면 그로 인해서 다른 누군가의 멍에가 가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멍에라는 것은 누군가 마땅히 지고 가야 할 의무를 멍에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멍에라는 것은 원래는 지워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과도하게 부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가 있으면 국민이 있고 국민의 의무가 있습니다. 가정이 있으면 가족 구성원이 있고 가족 구성원의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가 있으면 신자들이 있고 신자들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멍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마땅히 지고 가야 할 소명입니다. 사제가 미사 드리는 게 부담스럽다고 그걸 피하려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수도자가 기도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그걸 피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무턱대고 모든 멍에를 끌러 주는 것은 절대로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고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멍에인지 올바로 식별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필요한 것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가는 할머니에게 지팡이가 무거워 보인다고 들어 드리겠다고 하면 그건 할머니를 돕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선교 사명을 수행하기에 충분히 먹어야 하고

삶이 보이는가?

우리의 눈은 삶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죽음을 바라보기에는 죽음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삶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는 데에 소용되는 것들이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삶은 죽음과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균형이 잡힙니다. 죽음을 앞에 둔 삶은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애써 모으고 쌓아도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오면 오히려 더 큰 좌절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죽음과 함께 바라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삶은 '영원한 삶'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비로소 진정한 삶의 자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영원한 삶을 앞당겨 살아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봉사가 있습니다. 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 비로소 그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1) 죽음에서 도망가는 삶이 보입니다. 그들은 가능한 현세에 매여 살면서 여기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쾌락들을 한껏 누리려 듭니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죽음은 자신에게서 머나먼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는 나이와 상관 없습니다. 철들지 않은 삶입니다. 2) 죽음을 묵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삶에 그리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뿐입니다. 이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더이상 나아갈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버텨 나갈 뿐입니다. 3) 영원을 앞당겨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상의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영원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은 뚜렷한 목적이 있으며 현세를 가장 소중한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숙한 삶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빵이나 챙기는 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늘 나라는 먹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은 언뜻 아름다운 이야기로 보입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나병은 사라졌고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이렇게만 본다면 너무 순진한 시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는 악성 피부병의 영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죄는 사제에게 가서 드러내어져야 하고 사람들 앞에 고백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격리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이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2독서에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 어떤 영역에도 방해를 놓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고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피도록 합니다. 이렇게 두 독서를 앞에 배치하고 복음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복음 안에서는 이 독서에서 언급되는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사화에서는 특이한 점이 눈에 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위성과는 상관 없는 것입니다. 해 줄 수도 안 해 줄 수도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선의 안에서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치유들 같은 경우에는 마치 하나의 교리교재처럼 그 치유를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목적이 뚜렷한 경우가 많습니다. 헌데 이 경우에는 정반대로 예수님이 그냥 베풀어주는 치유입니다. 그래서 '말하지 말라', 즉 함구령이 떨어집니다. 그는 1독서의 예시처럼 그저 사제에게 가서 부정을 벗어난 확증을 받고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킬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떠나가자마자 주님의 고귀한 명령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병에서 구원해 준 사람에게 감사를 갖기는 커녕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행위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 행위라도 실은 이기적인 목적을 지닐 수 있습니다. 또 정반대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찮아 보이고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라도 그 내면에 지극히 고귀한 목적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선교라고 해서 모두가 선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지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선교사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선교지에서도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흔히 선교지의 생활은 엉망으로 하면서 나와서는 자신이 가장 고생하는 사람인양 둔갑을 해서 사람들의 선의에서 나오는 열매를 털어가서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용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본당에서 별로 눈에 드러나지도 않고 그가 하는 일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실은 자신의 가정에서 수많은 반대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충실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지닌 내적 가치는 세상의 시선으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상의 모든 행위가 거룩한 일로 변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은 성인들의 유해를 얻기 위해서 애를 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게 사신 분의 머리털 하나라도 소중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체'는 정반대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을 탄다고 그들이 사용했던 물건 조차도 쓰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분이 사용했던 것이라면 그 손길이 닿기만 한 것이라도 내적 가치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함이 닿아 있는 사람의 일상적인 삶의 모든 순간은 거룩한 것이 됩니다. 그 반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방해꾼'이 되게 됩니다. 이 방해는 3가지로 나누어 표현됩니다. 유다인이 상징하는 것은 '전통과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스인이 상징하는 것은

영적 악성 피부병

사제는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돌보는 양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게 도와주는 것이 하나이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구약은 악성 피부병을 바탕으로 그것을 식별하고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그 부정한 이를 격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감독는 사제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피부병은 '감염성 질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모든 이가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악성 피부병은 죄를 표상합니다. 죄는 그 자국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오래도록 잔존하여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사제는 식별해야 합니다. 잠깐 유혹에 빠지는 것과 오래도록 같은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잠깐 숙취에 시달리는 것과 이미 오래도록 같은 악습에 빠져 수많은 오류를 저지르면서도 또 술을 진탕 마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그 내면의 어둠을 올바로 식별하고 그에게 뚜렷이 그것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회복도 없고 개선도 없습니다. 잘못을 모르는데 뉘우침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 사회는 이 부분에서 많은 약점을 보입니다. 현대에는 '잘못된 것'을 애써 '다른 것'으로 포장하려고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에게 충고를 해 준다는 것은 선을 넘는 일이 되었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이는 소위 꼰대가 되고 맙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탐욕은 누구나 다 추구하는 일이 되고 불륜은 로맨스가 되어 버립니다. 모든 것은 그냥 그대로 좋은 것이고 바른 길은 따로 없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구원관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천주교의 가르침도 좋은 것인 만큼 불교의 가르침도 좋은 것이고, 심지어 미디어에는 온갖 점성술과 샤머니즘이 판을 쳐도 그건 그냥 하나의 문화라고 치부하

사람을 더럽히는 요소들

불륜 - 불륜의 가장 근원적이고 첫째의 자리는 하느님이라는 충실한 아버지에게서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인간 내면의 어둠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편적 차원의 불륜, 즉 배우자에 대한 불성실함도 함께 나옵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가정은 하느님 앞에 약속을 합니다. 헌데 그 약속을 무너뜨리고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그릇됨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한 약속에 불충실한 것입니다. 혼인은 공동체성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혼인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관계가 개입된다면 그에 대해서만은 배타적이어도 됩니다. 도둑질 - 타인의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단순히 실질적인 도둑질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재산 밖에도 많습니다. 누군가는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정당하게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고 살 줄 알고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이루어내고 구축한 것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다른 과대한 욕구를 지니는 것 자체가 사실상 도둑질의 첫걸음입니다. 살인 - 사람은 몸을 죽일 수도 있지만 여러가지 종류의 살인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험담하는 이들, 뒷담화 하는 이들은 어찌보면 광의의 살인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살인은 그 내면에 시기와 질투, 그리고 증오와 원한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살인은 최종적인 결과일 뿐, 실질적인 살인의 시작점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간음 -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아름다운 것이고 심지어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인격적 접근이 배제된 상대의 육체에 대한 탐욕은 더러운 것이고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에 끌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보듬어주고 사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결한 사랑을 배제한 채로 상대의 육체를 나의 욕구 해소 수단으로 대하는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얼마 전에 사목회의가 있었습니다. 잠깐 잠깐의 틈이 날때마다 모여있던 본당 간부님들에게 "쉬는 동안 본당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말씀 나누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중의 누구도 본당에 현재와 앞으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마음이 그 주제에 가까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몇 번이나 말씀하실 주제를 적어 오시라고 해도 늘 해 오시는 분들 외에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그 일에 가까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상에서 요구되는 어떤 직분에서 무언가를 이야기 나누어야 하고 문서화 해야 한다면 그들은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그것을 먼저 이룰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얻을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참외 재배를 위해서 하우스 비닐을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원하는데 그에 상응하는 문서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면 적지 않은 이들은 동분서주 해 가면서 그 문서를 완수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얻고 싶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거기에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가까이 있는 것을 늘 떠올리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것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의식을 회복하면 늘 시작하는 일입니다. 가장 마음 가까이 있는 것을 먼저 떠올리고 그것에 신경을 씁니다. 심지어는 자면서까지 그것에 관한 꿈을 꿀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그에 대한 그 자신의 반응을 살피면 통상적으로 그가 평소에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는지가 어렵지 않게 드러납니다. 돼지꿈을 꾸면서 복권을 사야겠다 하는 사람은 평소에도 늘 '돈'을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꾼 꿈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게 마련입니다. 성경 안에는 바로 그 꿈을 통해서 하느님의 메세지를 이해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탐욕스런 사람에게 같은 꿈을

아프면 일할 수 없다

아픈 사람은 일하지 못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요. 육체가 아픈 사람은 육체로 할 수 있는 일을 못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아픈 사람은 영혼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픈 이가 참된 신앙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부인은 병이 낫자 봉사를 시작합니다. 이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봉사를 한다는 것은 병이 나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봉사를 하지 않는 이,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을 하지 않는 이는 여전히 영혼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 안에서 하는 모든 것이 봉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미사에 나오는 걸 봉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봉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의무로 하는 일은 어찌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무인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고 하지 않으면 오히려 나 자신이 불행해지는 일입니다. 신자가 미사를 나오는 것은 안나와도 될 것을 내가 나와주는 거창한 일이 아니라 미사에 나오지 않으면 그 결과가 영원 안에서 나에게 불행으로 닥치기 때문입니다. 봉사라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진정한 의미의 봉사를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다들 어쩔 수 없이 등떠밀려 무언가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봉사를 시작하는 이는 병이 나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병세의 위중함, 영혼이 아플 때의 괴로움을 잘 체득한 사람이고 거기에서 해방된 자신에 대해서 하느님 앞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이들입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내는 내적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의미합니다. 영혼에도 빛이 지고 어둠이 찾아올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병든 이들이 늘어나고 마귀 들린 이들이 늘어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원자가 절실해지고 필요해지게 됩니다. 어둠이 없으면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 찾아오는 영혼의 어둠은 역설적이게도 주님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게 됩니

의무와 권리

의무는 해 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의무 지워지는 일을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반면 권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것으로서 어떻게든 사람들이 챙겨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채로 권리만 누리려고 하면 흔히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무와 권리를 균등하게 지니고 있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아빠가 해 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가 하면 아빠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아빠는 가족을 보살펴야 하고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동시에 아빠는 가족의 존경과 애정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본당 신자들을 하늘 나라로 이끌도록 영적 사정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 반면 사제로서 받는 권리도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균형이 맞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의무는 다 하는데 권리를 제대로 챙겨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를 말합니다. 복음은 최선을 다해 전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조롱과 원한, 증오일 때도 있습니다. 헌데 바오로 사도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받을 삯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권리에 대한 자발적인 포기는 비로소 ’거룩한 희생‘의 여지를 마련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 땅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신앙 생활은 현세 사람들의 눈에는 손해보는 것 뿐입니다. 시간과 노력과 심지어 금전까지도 손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손해가 영원 안에서 상급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에 동참하려면 주어진 의무나 하고 있어서는 부족한 것입니다. 의무는 맡겨지는 것이고 해 내야만 하는 것이며 오히려 하지 않을 때에 불행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가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삯은 스스로를

고통

고통 자체는 나쁜 것입니다. 훗날 하늘 나라에서 우리는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상의 삶에는 고통이 동반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고통이 우리에게 하나의 사명으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디에나 십자가를 걸어서 이 사명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 고통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고통에서 얻어지는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를 기대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부활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고통 이후에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지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고통 이후에 기쁨으로 이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결과를 암시하는 고통을 피할 줄 알아야 하고 나아가 긍정적인 결과가 뒤따르는 고통을 잘 고를 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육체의 고통과 영혼의 고통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반드시 벗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나면 그 누구도 육체의 고통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영혼의 고통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헌데 육체가 겪는 것은 순전히 육체에만 남지 않고 영혼에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육체를 올바로 다스리지 않으면 그 육체의 쾌락에 대한 그리움이 영혼에 남아 영혼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로 죄를 짓는 사람은 그 육체의 흔적을 영혼에 가져가게 됩니다. 저마다 죄 짓는 그 지체의 고통을 안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강한 어조로 죄를 짓는 육신을 끊어 버리라고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하지만 바로 그 무너진 곳에 치유가 있고 치유 받는 이는 기쁨을 얻습니다. 자신이 항상 받고 있는 보살핌을 소중히 여기는 이는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상실할 때에 그 본래의 가치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의로운 이들은 고통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게 하시고 악인들은 자신의 쾌락에 취해 멸망하게 만들어 두셨습니다. 이 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