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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에 가 닿다




모든 이가 신앙에 같은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서 다가올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처음부터 필요한 수준을 갖추고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마음을 다해 애쓰는 만큼 학교에서 준비된 여러가지 과정들을 습득하고 졸업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신앙으로 다가와서 저마다 애쓰는 만큼 신앙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전하려고 하는 바를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고 배워 나가며 실천해야 합니다. 그분은 단순히 방향만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 길을 먼저 걸으셨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신앙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세례'라는 고귀한 성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세례의 본질은 몸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사건을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이 바른 양심은 단순히 올곧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초자연적인 일, 바로 부활이 전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바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이성적 판단으로 우리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는 양심에 따라 식별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그 범주를 넘어서서 '영원'에 가 닿아야 합니다. 영원이라는 색다른 시야를 지니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일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의 본질적 차원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언가를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다니기 싫은 직장에 다니는 것은 비록 싫지만 그곳을 다니면 '월급'이라는 되갚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세상 안에서의 거래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합니다. 심지어 자선과 희생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에 상응하는 세상의 되받음, 명예와 인기와 같은 것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거기에서 사람들은 멈추어 버립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는데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십니다. 의인을 위해서 대신 나서서 고난을 겪는 것은 세상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의한 자들을 위해서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힘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교회 소속증이나 종교 활동 허가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의 본질은 영적인 차원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앞당겨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받는 세례는 훗날 다가오실 예수님의 진정한 영광과 권능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든든한 빽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가 자신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일에도 도전하게 되는 것처럼 참된 신앙을 지닌 이는 인간적 능력이 한계에 가 닿는 그곳에서 점프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성소의 여정에 뛰어드는 젊은이의 힘인 셈입니다. 세속적인 계산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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