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바람직한 뜻을 품고 자신이 하려는 일을 할 때 모든 것이 그 일을 도와 순풍이 불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신이 가려는 여정에 반하는 힘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영적인 여정도 마찬가지라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마냥 순탄하고 좋기만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분별하면서 그것이 당장 나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피상적인 면을 살펴봅니다. 예를 들어 사제직이라는 것을 바라볼 때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처음부터 파악해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좀 있어 보인다던지 신부님이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다던지 하는 식의 관찰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막상 사제가 되고 나면 '이런 일도 겪어야 하나' 싶은 여러가지 현실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루 하루 스스로 결정해 나가야 하는 삶이 죽는 날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오늘 1독서에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겪는 고충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예언자였고 말씀을 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도리어 그런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공격하여 명예를 실추시키고 실질적인 손해를 야기시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정작 예레미야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복을 빌어 주고 하느님의 분노를 돌리고자 애를 씁니다.
화답송 안에서도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답송의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방에 둘러싸여 자신을 반대하여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모략 앞에 놓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미숙한 이해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뭔가 좋은 것이 있으리라는 단순한 생각 속에 그 아들에게 영광된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마실 잔의 성격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첫째가는 자리에 머무르는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섬기러 온 왕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바쳐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당신 사명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교회의 이 가르침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사람들 안에 온전히 스며들어 이해되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이 태어나서 신앙을 접하고 누구나 처음에는 세속적인 매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신앙의 여정이 시작되면 누구나 신앙 안에 십자가가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순이 이제 한 주간을 넘기고 두번째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처음에 세웠던 거룩한 의지를 잊지 말고 반대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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