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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에제 18,25)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선을 '늘 착해 보임'과 착각을 해서 하느님이 늘 착해 보여야 하는 분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는 큰 착각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공정과 정의를 잘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으며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마치 복잡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합니다. 선을 행하는 이는 행복 안에서 살고 악을 저지르는 이는 순식간에 처단되어 사라져 버렸으면 참으로 단순하고 좋겠건만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의 이런 기대와는 달리 선을 행하는 이들이 도리어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반대로 악을 행하는 이들이 더욱 성공해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1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노선을 명백히 밝혀 줍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에제 18,26-27)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다고 하고 선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세상에는 악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선하지 않거나, 아니면 선하신데 전능하지 않아서 악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아닌가?"


우리는 완전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로서는 '완전'은 딱딱히 굳어져서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더이상은 손댈 이유가 없는 상태를 '완전'이라고 개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살아있음은 움직임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 완전하신 하느님은 동시에 창조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그 사랑을 주고자 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서 자유를 지닌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 안에서 두 가지가 기인하게 됩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죄악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한정된 시간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시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은 얼마든지 시간을 두고 우리를 바라보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일을 조급하게 해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영원'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은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당신의 가장 완전한 공정과 정의로 세상을 정돈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 누구도 공정하지 못하다 정의롭지 못하다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재미난 것은 그런 하느님이 도리어 우리에게 '구원을 받아달라'며 사정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정도 능력을 지닌다면 자신을 속상하게 하는 이들에게 앙심이라도 품고 나중에 두고보자 할 만도 한데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방향을 돌이켜 당신을 바라봐 달라고 애가 닳도록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공평하다못해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주인의 후함을 시기하는 우리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인도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우리처럼 악인이 심판받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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