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고 느끼는 것과 좋은 것, 싫다고 느끼는 것과 싫은 것은 사실 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예를 들어 볼까요? 정의는 정의가 없어서 시달린 이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정의롭지 않게 자신의 이득을 추구해 온 사람에게는 두렵고 꺼려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가치들이 비슷합니다. 좋은 것이 모두 좋게 느껴지는 법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그릇되이 실행하고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로 인해서 진정으로 좋은 것은 우리에게 힘겹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순이 싫은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사순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싫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세속의 삶에 익숙해져 있는 가운데 영적인 가치로 방향을 돌이키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힘겹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세속 안에서 지쳐가고 하느님의 손길이 아쉬웠던 이들에게 이 사순이라는 시기는 훌륭한 영적 피정의 시기가 됩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악한 행실'을 치워 버리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치워내야 할 악한 행실을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것을 오히려 악한 것으로 분류해서 우리에게서 치워 버리려고 시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의 예를 듭니다. 진정으로 거룩해지는 것과 사람들 앞에 거룩해 보이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해지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거룩해 보이기 위해서 애써서는 안됩니다. 참된 거룩함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뜻하는 바를 알아서 그것을 스스로 구체적인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거룩한 이는 주변에서 다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속에 하느님의 향기가 풍겨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룩해 보이기만 하는 사람은 위선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선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자신이 세속적으로 추구하던 것들을 더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을 실행하는 척 이기적인 야욕을 달성하는 사람이기에 '위선자'가 됩니다. 그것은 선이 아니라 거짓된 선이고 곧 악이며 우리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행위가 됩니다.
오늘 화답송의 한 부분입니다.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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