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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더럽히는 요소들



불륜 - 불륜의 가장 근원적이고 첫째의 자리는 하느님이라는 충실한 아버지에게서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인간 내면의 어둠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편적 차원의 불륜, 즉 배우자에 대한 불성실함도 함께 나옵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가정은 하느님 앞에 약속을 합니다. 헌데 그 약속을 무너뜨리고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그릇됨만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한 약속에 불충실한 것입니다. 혼인은 공동체성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혼인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관계가 개입된다면 그에 대해서만은 배타적이어도 됩니다.


도둑질 - 타인의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단순히 실질적인 도둑질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재산 밖에도 많습니다. 누군가는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정당하게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고 살 줄 알고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이루어내고 구축한 것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다른 과대한 욕구를 지니는 것 자체가 사실상 도둑질의 첫걸음입니다.


살인 - 사람은 몸을 죽일 수도 있지만 여러가지 종류의 살인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험담하는 이들, 뒷담화 하는 이들은 어찌보면 광의의 살인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살인은 그 내면에 시기와 질투, 그리고 증오와 원한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살인은 최종적인 결과일 뿐, 실질적인 살인의 시작점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간음 -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아름다운 것이고 심지어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인격적 접근이 배제된 상대의 육체에 대한 탐욕은 더러운 것이고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에 끌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보듬어주고 사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결한 사랑을 배제한 채로 상대의 육체를 나의 욕구 해소 수단으로 대하는 것에서 간음이 시작됩니다.


탐욕 - 욕구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르면 마셔야 합니다. 따뜻한 옷을 입고 안락한 집에서 자고 싶은 것은 정당한 욕구입니다. 탐욕은 정당함을 넘어서는 욕구를 말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이를 식별하는 일이 참 어렵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원하는 것이나 겨우 채우는 것으로 다들 만족했고 상황 역시도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수많은 SNS를 통해서 지나치게 확장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원치도 않을 것을 보고 듣고 그 욕구를 지나치게 키워서 우리의 내면의 탐욕을 키우는 현실입니다.


악의 - 악한 의도를 말합니다. 인간은 원래 하느님의 피조물로 우리 안에는 '선'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습니다. 이를 양심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언제든지 이를 뒤집어서 악을 자행하려는 욕구로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차의 엔진의 힘은 동일한데 그것으로 도로를 빨리 주행해서 목적지에 빨리 닿을 수도 있는 반면, 핸들을 꺾어서 그 속도로 누군가를 들이받아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악의는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회개하고 뉘우쳐서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방치해서 행동으로 뿜어져 나오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야기하게 됩니다.


사기 - 누군가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를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땀흘려 노력해서 거기에서 나오는 소출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으로 사람을 속여서 상대가 이룩해 놓은 것을 쉽게 취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이 열심히 해 놓은 일을 마치 자신의 업적으로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기에 해당합니다.


방탕 - 방탕은 모든 위중한 악으로 가는 전초기지 같은 것입니다. 마치 쓰레기를 버리려고 하는데 너무 깨끗한 곳이 있으면 버리기가 쉽지 않으나 이미 상당히 더럽혀진 곳이 있으면 너무나도 쉽게 쓰레기를 버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로 보다 하느님 앞에 순수하고 경건하도록 올바른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방탕함 속에서 더 큰 악을 찾아 다니게 됩니다.


시기 - 남이 가진 좋은 것을 증오하고 심지어 파괴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웃의 선익에 대해서 함께 기뻐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시기는 그와 내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예를 들어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다고 발가락이 시기할 일은 없습니다. 같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와 상관 없는 이에게 일어나는 이득에 대해서 우리는 시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기는 악마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선익에 파괴적인 마음을 품는 것은 악마적인 일입니다.


중상 - 앞서 살인에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해서 사회적인 살인을 시도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중상은 공동체적인 죄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이야기를 즐겨 듣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없으면 전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식별력을 지니고 사람의 구체적인 삶으로 그를 식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의도는 다채롭고 그들이 하는 말의 의도를 올바로 식별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중상의 죄에 동참하게 됩니다.


교만 - 인간의 겸손이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이끌어들이는 훌륭한 덕목이라면 교만은 인류가 시초부터 지녀온 악덕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여러 면에서 충돌을 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를 역으로 되짚어 살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항상 교만한 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교만을 하느님 앞에서 드러내기 시작할 때에 그는 회복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됩니다.


어리석음 - 사람은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무지함에 남아 있게 되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은 방탕과 비슷하게 작용해서 더 많은 악을 끌어들이는 나쁜 환경을 조성합니다. 어리석음은 단순히 지식의 부족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의 부족을 의미합니다. 지혜가 마땅히 깃들어 있어야 할 나이에 여전히 위의 수많은 악덕들을 친구삼아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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