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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고통 자체는 나쁜 것입니다. 훗날 하늘 나라에서 우리는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상의 삶에는 고통이 동반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고통이 우리에게 하나의 사명으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디에나 십자가를 걸어서 이 사명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 고통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고통에서 얻어지는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를 기대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부활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고통 이후에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지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고통 이후에 기쁨으로 이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결과를 암시하는 고통을 피할 줄 알아야 하고 나아가 긍정적인 결과가 뒤따르는 고통을 잘 고를 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육체의 고통과 영혼의 고통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반드시 벗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나면 그 누구도 육체의 고통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영혼의 고통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헌데 육체가 겪는 것은 순전히 육체에만 남지 않고 영혼에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육체를 올바로 다스리지 않으면 그 육체의 쾌락에 대한 그리움이 영혼에 남아 영혼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로 죄를 짓는 사람은 그 육체의 흔적을 영혼에 가져가게 됩니다. 저마다 죄 짓는 그 지체의 고통을 안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강한 어조로 죄를 짓는 육신을 끊어 버리라고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하지만 바로 그 무너진 곳에 치유가 있고 치유 받는 이는 기쁨을 얻습니다. 자신이 항상 받고 있는 보살핌을 소중히 여기는 이는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상실할 때에 그 본래의 가치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의로운 이들은 고통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게 하시고 악인들은 자신의 쾌락에 취해 멸망하게 만들어 두셨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이 고통의 신비가 온전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훗날 영원한 나라에서 그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선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찬송합니다. 


화답송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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