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소식,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폭발적인 정보사회에서 우리는 소식을 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정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소식들이 밍밍해 집니다. 마치 향수를 원액 그대로 사용한다면 엄청 진하고 소중하게 여겨지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물이나 알코올과 섞어 버리면 그 향이 있으나 마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고귀한 것과 하찮은 것이 구분이 잘 되었습니다. 하찮은 것은 우리가 일상의 영역에서 가볍게 다룰 수 있었고 고귀한 것은 비싼 돈을 들여야 겨우 배우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영적인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은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과거 사제직이 귀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영적인 이유보다도 배움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귀한 것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하찮게 다루어집니다. 따로 귀한 것과 하찮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넘쳐 흐르다보니 세상에서 떠도는 뜬소문이나 신앙의 진중한 가르침이나 구분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구약에 나오는 ‘요나’ 예언자의 활동은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선포했고 사람들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요나조차도 선포하기를 거부했던 메세지였지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피할 수 없는 체험(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는 체험)으로 인해서 결국 선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는 사람들에게 가 닿자 마치 촉매가 작용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니네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회개를 일으켰습니다.
헌데 요나가 외치는 것이나 오늘날 교회가 외치는 것이나 본질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는 말은 그 핵심에 있어서 ’한정된 기간이 흐르고 나면 멸망이 다가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마쳐지는 날,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멸망이 들이닥친다는 말이고 회개하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복음선포 환경은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쏟아내는 수많은 소식들에 파묻혀 신앙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교회 안에서도 여러가지 신경써야 할 것 같은 온갖 잡다한 일들 속에 선포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확고히 믿을 만한 신앙의 뚜렷한 표징들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표징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요나, 즉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머물다 다시 살아난 이의 선포입니다. 3일 간의 죽음에서 부활한 한 인물이 나타나 외칩니다. ’회개하라’ 즉 가던 길을 돌이키라는 선포입니다. 그것 말고 색다른 선포는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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