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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5의 게시물 표시

두 번째 죽음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묵시 2,11)

첫째 죽음은 당연히 우리가 아는 것이고 지상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육신의 죽음이지요.

헌데 묵시록에는 ‘두 번째 죽음’ 혹은 ‘둘째 죽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한 번 죽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두 번 죽는다는 이야기이지요.

첫 죽음에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잃습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이는 다가오는 두 번째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준비된 이들은 이 두 번째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분명하게 약속된 것입니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는 행복하고 또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이들에 대해서는 두 번째 죽음이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제가 되어, 그분과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릴 것입니다.” (묵시 20,6)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자들, 그분의 뜻을 알고도 전혀 실천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두 번째 죽음’이 다가옵니다.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 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묵시 21,8)

속지주의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어떻게든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습니다. 특별히 급한 용무가 없는 이상은 그렇게 합니다. 헌데 오늘은 용무가 하나 생겼네요. 장례가 생겼습니다. 헌데 장례가 난 곳이 제 본당 구역이 아닙니다.

“오늘은 가 드릴께요. 제가 안타까우니까요. 하지만 앞으로는 본당 신부님께 청하셔야 해요. 여러분들이 머무는 곳의 본당은 여기가 아니라 OOO신부님이 있는 본당이에요. 앞으로는 그리로 가서 예식을 청하도록 하세요.”

가톨릭 교회는 ‘속지주의’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의 본당을 가는 것이 원칙이지요. 이는 신자들의 편의를 위함입니다. 가톨릭의 특징은 ‘보편성’이라는 것이고 어딜 가든지 자신이 머무는 곳의 성당에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지요. 하지만 구획이 잘못 나눠지면 더 가까운 본당이 있는데도 자신이 속한 본당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가톨릭의 구획 개념이 없는 신자분들은 그런 면에서 혼란스러워 하지요. 거기에 원래 자신이 속한 본당의 사목자가 크게 신자들을 돌보지 않는 경우라면 더 안타까운 일이 속출합니다.

가톨릭이 다른 교회처럼 될 가능성은 아직 없습니다. 즉 사목자의 역량에 따라서 교회가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하는 식의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정해진 구역 안에서 일할 뿐입니다. 속된 말로 소위 말하는 ‘나오바리’가 있는 것지요. 그러나 때로는 선을 넘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니까요. 그러나 이런 문제가 계속된다면 교회 당국자를 만나 정돈을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요. 나중에 주교님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ㅎㅎㅎ

믿지 못하는 이유

이해하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본질적으로 이해의 지평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다 이해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믿기를 결심하는 거지요.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교만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의심스럽게 하는 자들’ 때문에 그렇지요.

인간의 교만은 자신보다 위대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설령 받아들인다 해도 전혀 나와 상관없는 존재라는 듯이 받아들이곤 하지요. 즉, 하느님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에너지, 결정적으로 나의 삶과 별로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해 버리고 마는 식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정당하게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분이시지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인간의 교만은 시초부터 끊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믿음을 가로막는 것은 ‘의심스럽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그릇된 진리를 전하는 이교집단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참된 가르침을 가리우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하느님의 진실한 뜻을 가리고 엉뚱한 것을 보다 중요한 듯이 말하고 다니는 이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믿음을 가지려는 자들 앞에서 드러내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행위들이라 순진한 사람들은 참된 믿음 자체를 가지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존재를 대뜸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참된 믿음에 이르는 것이지요. 교회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올바로 드러내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지요. 그리고 교회의 성실하고 충…

교양

교양이라는 것은 문명사회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배운 사람으로서 그 합당한 품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교양이라는 것이 자신의 본의를 감추는 가면으로도 얼마든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볼리비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만큼 교양이 있지 못합니다. 별로 배우질 못했지요. 배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가리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부족한 셈이고, 역으로 솔직한 편입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는 것이 바로 드러나지요.

인간의 내면 근본에 자리잡고 있는 ‘의도’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셈입니다. 그러나 교양있는 이들은 좋아도 교양으로 가릴 수 있고, 싫어도 교양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숨길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자동차에 완충 장치가 있고 없고의 차이와 같습니다. 완충 장치가 있으면 바퀴의 울림이 완화되어 전해지지만 완충 장치가 없으면 그 충격이 그대로 전해지지요. 운전을 하기에는 완충장치가 있는 편이 편하겠지만, 바닥의 상태를 알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완충장치는 오히려 가림막이 되는 셈입니다.

사실 우리는 한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완충막이 될 수 있는 교양을 필요로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사항은, 하느님 앞에서는 교양이 크게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교양 있고 예의 바르게 거짓말을 해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하하.

2000년 전의 예수님과 나

한때 저 역시도 가졌던 질문입니다. 2000년 전의 사건과 지금의 내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길래 예수님이 지금의 우리의 죄마저도 짊어졌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의 핵심이었지요.

과연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무슨 상관이 있어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2000년 전에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 같은 일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개념입니다. 누차 설명한 바가 있지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다시 설명하면 시간은 흐르는 시간과 농도의 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강에 물이 꾸준히 흐르지만 그 안에 고기떼가 움직일 때에 그냥 강물만 있는 것은 물일 뿐이고, 그 안에 고기가 가득 든 것은 고기가 가득찬 물이 되겠지요. 다른 비유로 봄에서 가을까지 흐르는 것은 시간이지만 열매가 익는 시간은 때가 차야 익게 됩니다. 이 때가 차는 순간이 보다 더 중요한 시간인 셈이지요.

처음으로 확실해 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은 바로 이 때가 찬 순간에 역사 안으로 다가오신 분이시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예수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과연 예수님은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기본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늘 두 가지 극변 사이에 존재합니다. ‘선과 악’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선과 악은 단순히 계명의 준수 여부에 달린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차원에서 선과 악은 하느님을 향하는가 아니면 반대 방향을 향하는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중립 상태에서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방향을 바라보게 되지요.

그 최초의 경향을 ‘원죄’라고 하고 이는 첫 인간의 첫 배반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중립의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경향에다 자신의 의지를 더해 ‘…

못마땅한 이유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태 13,57)

한 아이가 동생과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성격이 좋아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헌데 동생이 친구들과 놀다가 멋진 장난감을 얻어왔습니다. 그러자 형은 동생을 시기하기 시작하고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엄마와 사춘기 딸이 있습니다. 정말 사이가 좋았습니다. 헌데 어느날 딸이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엄마도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딸이 자꾸 밤에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가겠다고 합니다. 엄마는 당연히 걱정이 되어서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딸은 엄마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상사와 부하 직원이 있습니다. 둘은 서로 도와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부하 직원이 일을 좀 쉽게 처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상사는 원래부터 지켜져오던 ‘원칙’을 고수하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부터 부하직원은 상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못마땅한 이유는, 진리와 정의를 거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못마땅한 이유는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고,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 특히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뭔가를 그릇되이 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그들의 마음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엇나감이 많습니다.

우리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 대상이 어긋나 있다면 그건 못마땅한 게 아니라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것이지만, 상대에게 딱히 그릇됨이 없는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면 나의 못된 심보에서 비롯되는 이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시는 이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요한 13,18)

예수님께서 아시는 이들. 예수님께서 아신다고 하는 의미는 단순히 그의 프로필이나 경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을 내면까지 깊이 알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까지 아시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건지까지 알고 계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유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의 첫 순간부터 그를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한 인간을 그 깊은 생각까지 알면서도 완전한 멸망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 그를 부르신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는 표현은 대단한 것일지 몰라도 한계가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최선을 다하셨다는 표현은 그야말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다 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만에 하나, 유다가 마음을 바꿔 먹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충분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한 셈이지요. 끝까지 자신의 어두움을 굳히기로 마음을 먹은 셈입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 가운데 그를 통해서 자신이 배반 당하고 넘겨질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지요. 그럼에도 그를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한마리 어린 양처럼 목을 자르려는 이에게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닌 모든 악의가 자신을 통해서 결과를 드러내게 내버려 두셨지요.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유다의 자유로운 선택과 예수님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십자가 상 죽음이라는 사건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은 그에 합당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한 인간의 비참한 운명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

낮아짐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

사제 서품식 때에 후보자들은 제대 앞에 엎어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바치겠다는 상징이지요. 가장 낮은 자세로 봉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이 쓰러진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쓰러진 자로서 봉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 사제들의 이상향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도달해야 할 위치인 셈이지요.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 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로 다툰 것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찾아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언제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이 처했던 자리를 이해하게 되는 때는 언제가 될까요?

문제는 ‘시간’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회개’에 있습니다. 우리는 놓치기 싫은 거지요. 우리는 낮아지기 싫은 셈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높은 곳을 선호하는 마음을 그대로 둔 채로 잠시 낮아져본 셈이지요. 우리의 마음 근본에는 가장 낮은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일 뿐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로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배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우선이 되고 싶어합니다. 능력이 되는 선에서는 최고를 취하고 싶어하고 가능한 한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지요. 우리에게 어린 아기가 되어 다가오시고 가장 미천한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직 요원할 뿐입니다.

El Toborochi o sea el arbol del refugio 또보로치 또는 피신처 나무

Hace mucho tiempo, cuando los dioses vivían en la tierra como personas, los espíritus (Aña) de la oscuridad abusaban mucho de los primeros guaraníes, asesinaban a los hombres y se robaban a las mujeres.
아주 오랜 옛날, 신들이 이 땅에 인간처럼 살 적에, 어둠의 영들(아냐)이 초창기 과라니인들을 수탈했다. 그들은 남자들을 살해하고 여자들을 훔쳐가곤 했다.

En una pequeña aldea vivía una hermosa muchacha a la que llamaban Araverá "Destello en el cielo", hija del gran Cacique Ururutï Cóndor Blanco. Ella se había casado recientemente con el dios Colibrí (Chinu tumpa), y esperaba tener un hijo en muy poco tiempo, el mismo que se convertiría en el mejor Chamán (Paye) de la región, capaz de derrotar a todos los espíritus del mal.
한 작은 마을에 아라베라(하늘의 섬광)라고 불리는 소녀가 살았는데, 흰 솔개 우루루띠 추장의 딸이었다. 그녀는 벌새의 신(치누 뚬빠)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곧 아들을 낳을 예정이었다. 그 아들은 모든 악의 영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그 지역의 최고의 차만(빠예)이 될 예정이었다.

Los Aña, al enterarse de la noticia, se propusieron matar sin miramiento a Araverá. Montados en sus caballos alados que lanzaban fuego por la boca se dirigie…

주님께서 보내신 이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떤 내면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내 돈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돈에 관심이 없을 리가 없고, 내내 이성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이성에 관심이 없을리가 없습니다. 행동에서는 더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부유한 이와 머물러 어울리길 좋아하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 이가 가난한 이를 사랑한다고 떠들어봐야 소용 없는 일이지요.

주님에게서 파견된 자를 분별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속이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정한 사명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지만 예수의 이름이 먹히는 동안 그 이름을 들먹이면서 선한 척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할 뿐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그 일을 합니다. 그러니 그들을 자세히 관찰한다고 해서 뭔가 눈에 띄게 보이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따라야 하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걸까요?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외쳐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예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분의 진정한 가르침의 핵심을 따라서 아는 바대로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신비적인 부분, 초자연적인 부분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기도’라는 좋은 수단이 있고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한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의 청을 들으시고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선을 향해 나아가는 이는 그것을 잘 인지하고 있으며, 반대로 악을 향해 나아가는 이도 자신이 저지르는 짓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의도를 믿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어떤 아저씨

사무원이 저를 찾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저를 찾는다고 하면서요. 사무실로 가 보니 어떤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신부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 무슨 일이신가요?

- 제가 원래는 라파스에 사는데 여기 일하러 왔다가 사기를 당해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제가 생선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인데 저랑 일하기로 계약을 맺은 사람이 저를 속이고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날라 버렸습니다.

- 저런, 지금까지는 어떻게 지내시구요?

- 6일동안 떠돌아 다녔습니다.

- 그렇군요. 기억나는 전화번호 있으세요? 집이나 친척이나?

- 제가 당한 일 때문에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가톨릭 신자분은 맞으시구요?

- 성당 열심히 다녔습니다. 독실한 신자입니다.

- 어느 성당에 다니셨나요? 신부님 이름 생각나세요?

- 마르틴 신부님이었습니다.

- 본당이 어디지요?

-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베르메호에 있습니다.

제가 휴대폰을 꺼내서 베르메호의 본당을 찾아보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저씨가 조급하게 대답을 합니다. 아마 제가 전화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거는 게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 아, 지금 생각해보니 개신교 교회였던 것 같군요.

- 그래요? 당황스럽네요. 여기 오시기 전에는 어디 계셨나요?

- 와르네스(우리 동네 옆 동네, 차로 15분 거리)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일하기로 했었거든요.

- 그럼 와르네스에 원래 일하기로 했던 곳은 어딘가요?

- 없습니다. 원래 거기에서 일하기로 했는데 못하게 되었습니다.

- 근데 와르네스의 하고 많은 개신교 교회와 성당을 놔두고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뭐지요?

- 경황이 없는 중에 걷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 죄송합니다. 형제님. 제 분별로는 형제님을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형제님이 저에게 말한 것만으로는 저는 형제님이 정말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많은 분들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께는 도움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망하는 자들

우리는 주변에서 큰 재앙을 바라보면서 알지 못할 존재의 분노를 감지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하느님이 노했다’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통상적인 정서이지요. 물론 이는 단순히 한국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입니다.

그럼 이제 하느님 편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대재앙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질러놓은 죄악의 결정판으로 이루어지는 재앙에 관한 것입니다. 삼풍 백화점이나 세월호 사건 같은 것은 인간의 죄악이 누적되어 결과적으로 한 지점에서 폭발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 누군가는 물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왜 그들을 구원하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하느님은 무능력한 것이 아니냐고 따지고 묻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의 무능력의 결과일까요? 아니면 일찍부터 예견되어 왔고 사전에 경고되어 온 일을 실천하지 못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정당한 결과일까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인간의 죄악의 결과인 것은 인정하지만 왜 악인들이 심판받지 않고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이 그 피해를 보아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참으로 미묘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항목별로 정돈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만드셨고, 선으로 모든 것을 가꾸어 나가셨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이 악하게 나아갈 때조차도 하느님은 자비를 통해서 인간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조리 엉망 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마저 왜 당신의 자비로 모두 완벽하게 없던 일로 돌리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그런 질문을 하는 이 스스로 생각해 보셔야 할 문제입니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말입니다. 이는 마치 자기 스스로 불량식품을 마구 먹는 아이에게 부모님이 사랑과 애정으로 그러면 안된다고 온유하게 충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구 먹어 놓고는 나중에 배가 아프니 그 아픈 배를 어찌해 달라고 떼를 쓰는 못된 아…

내가 한 바로 그 말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요한 12,47-48)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당신이 심판하지 않고 당신의 ‘말’이 심판을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말이라는 것은 단순한 ‘소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소리는 벽에 부딪혀도 나는게 소리이고 박수를 쳐도 나는 게 소리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그 안에 의도와 뜻이 담긴 것이지요.

말에도 종류가 여러가지가 있으니 단순한 정보를 담은 말이 있는가 하면 강한 의지를 담은 말이 있습니다. 물론 아무런 의지가 담기지 않은 말은 없습니다. 뉴스 앵커가 하는 말은 정보만이 아니라 그 기사를 쓴 자의 의지, 즉 자신의 기사를 믿어 달라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지요.

그럼 결국 모든 말들에는 최초 발설자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셈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에게 유용하다고 생각되고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말들을 들으려 하지요. 수많은 말들 가운데 우리 자신이 선별하는 말들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단순히 ‘듣는다’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내면적으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한 가운데 ‘하느님’에게서 발설된 말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말들이지요. 그 말들 속에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 즉 구원의지가 존재합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께로 이끌려는 강한 의지가 존재하지요.

우리는 그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셈이지요. 그 말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드러나게 되지요. 말씀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들이 갈리는 셈입니다.

그렇…

빛과 어두움

오늘 수녀원에서는 비교적 강론을 짧게 했습니다. 빛과 어두움에 대한 고찰이었지요.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빛과 어두움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태양빛도 빛이고 전구도 빛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빛을 선호합니다. 빛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이 들지요. 반면 어둠을 선호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퀴벌레, 박쥐, 부엉이 등과 같은 존재들이지요. 그들은 어둠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둠이 있어야 숨을 수 있고, 어둠이 있어야 먹이를 사냥할 수 있지요.

영적인 면에서도 빛과 어두움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빛이 무엇인지 ‘지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빛이시고 그분의 말씀과 계명이 빛이지요. 그리고 그 반대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반대되는 것들, 증오, 이기심, 탐욕, 시기와 같은 것들이 어두움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죄스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돈은 그 자체로는 수단일 뿐이지요.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기업인이 정당하게 필요로 하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지만, 청빈을 결심한 수도자가 자신의 몫도 아닌 돈을 탐내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탐욕’이고 어두움이지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어두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심판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지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 때에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은 우리가 ‘지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될 것입니다. 즉,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있고 바로 그 사실이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심판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 빛을 전하는 이들이 시련을 당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퍼마시는 걸 좋아하는 데 거기에서 술을 과하게 먹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시련을 당할 수 …

지상에 매인 정신

우리는 어떤 주제이든지 천상의 것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지상의 것을 먼저 걱정합니다. 동정자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정자의 삶 안에서 얻게 될 천상적 가치들, 즉 하느님에게 예비된 삶에 대해서 감탄하고 그들의 복된 고독과 헌신의 삶에 대해서 경탄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들의 지상적 삶, 즉 ‘어떻게 섹스도 안하고 혼자 살 수 있지?’ 따위를 걱정하지요.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니 우리의 생각은 아직 지상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접하게 되는 성인들의 삶에서 그들이 천상적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 우리의 정신은 자연히 닫혀 있는 상태로 머무르기 때문에 그러한 글들에 대한 이해력도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나 그들이 행한 ‘신기한 일들’이 더 관심이 가는 것이지요. 비오 신부님이 여전히 유명한 이유는 그분의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열정, 그리고 하느님과의 진실한 친분 관계가 아니라, 아직도 그분의 손발의 신기한 상처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메마른 정신은 천상의 사정으로 다가갈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데도 일부 신앙인들은 자신이 단순히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내세우며 자신의 지식이 굉장히 많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 또한 교만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정신은 여전히 지상에 매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선호도가 분명히 차이가 나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지상의 것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당신에게 이끄시려고 노력하십니다. 처음부터 천상적 결심으로 신학교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신부님이 멋있어 보이고 뭔가 좋은 게 있을 것 같아서 들어가는 거지요. 수도원에 입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구도 수도원 안에서 사소한 일에 마음 아파하며 힘든 공동체 생활을 하려고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엔 누구나 수녀님이 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공상을 품고 들어가는 거지요.

수다

우리의 대화는 서로를 지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루를 살면서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그 안에 ‘진정성’이 담긴 대화는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은 서로 알고 있는 정보를 주고 받기에 바쁘고 또 서로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대부분인걸요. 그런 대화는 우리를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 스트레스를 푼다는 핑계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매곤 하지요. 사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것도 몸을 해치는 술과 더불어서 말이지요. 그러나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생각하는 셈이지요.

하느님께 감사하는 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았다고 느껴집니다. 무언가 변한 게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머물러 있는 곳에 그대로 있고 저의 할일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의 생각이 바뀐 것이지요. 우리의 일상은 모두 은총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우리는 불만에 가득차고 슬퍼하게 되는 것이지요. 깨달음은 한순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참된 평화가 찾아들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을 꾸준히 받아서 비로소 그걸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것을 꾸준히 받습니다. 다만 받는 이의 약함 때문에 그것을 때로는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 뿐이지요. 받는 이가 인식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 그는 일상 안에서 감사와 기쁨에 넘치게 됩니다.

파견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요한 12,44-45)

파견을 보내는 이유는 파견 보낸 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파견을 받는 이는 자신의 뜻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만일 자신의 뜻을 내세우려면 파견을 받기 전에 그 의사를 충분히 표현해서 그 파견을 다른 이에게 미루어야 합니다.

파견을 받았으면 그때부터는 파견 보낸 분의 뜻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파견이 끝나고 모든 임무가 완료될 때까지 쉬면 안되지요. 그것이 파견 받은 이의 책임감입니다.

파견을 받은 이의 특징은 자신의 뜻보다 파견 받은 이의 뜻을 우선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파견 받은 이를 만나서 일을 하는 것은 파견 보낸 이를 만나서 일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 해 보지만, 그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되는 셈이지요.

물론 타 종교가 들으면 상당히 불쾌해할 부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참으로 교만한 표현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게 되고 그분이 진정으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분을 대놓고 거부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생각을 조금 확장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파견을 받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나의 것들에 집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인지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파견을 받으라는 것이 사제나 수도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파견’을 성취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한 분류로만 파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심장이 온 몸에 피를 …

증명서를 위해서 세례를 찾는 자매

오늘도 증명서를 위해서 세례를 찾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세례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그 증명서가 우선인 사람이었지요. 성인 견진 과정을 1년동안 수료하고 세례와 첫영성체, 견진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지금 당장 받을 수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나이가 얼마냐고 물으니 스물 두 살이랍니다. 불쌍하고 안쓰럽다고 마구 세례를 줄 수는 없지요. 본당 주임 사제로서 그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거룩한 것을 마구 던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매님, 지금 자매님은 세례를 찾는 목적 자체에서 어긋나 있어요. 자매님은 진정 자신의 구원을 바래서가 아니라 세례의 외적 껍데기에 불과한 증명서를 위해서 그것을 받으려는 거지요. 지난 22년동안의 시간 동안 자매님은 성당을 찾지 않았어요. 그것은 별다른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와서 증명서가 필요해서 성당을 찾고 있는 거예요. 헌데 저로서는 양심적으로 참으로 소중한 세례를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는 노릇이예요. 그러니 내년에 와서 정식으로 등록하고 견진을 준비하면서 세례를 받도록 하세요.”

“지금은 왜 안되는 거지요?”

“지금은 이미 수업을 상당히 진행한 상태이기 때문이에요. 신앙이라는 것도 나름의 배움의 과정이 있어서 초반의 내용을 다 빼먹고 들어가서 시간만 때운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처음부터 차분히 배워 나갈 필요가 있어요. 익숙해져 나아가야 하는 거지요.”

“저는 처음 부분을 안들어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똑똑한데요.”

“하하하.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 같군요. 일단은 주일 미사에 나와 보세요. 그렇게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세요. 그러면서 천천히 준비해 나가길 바래요. 지금 당장 세례를 받으면 자매님은 더는 성당에 나오지 않을 게 뻔해요. 우리 솔직해 집시다. 원하는 걸 취했으니 더는 아쉬울 게 없겠지요. 그러니 아이 데리고 주일 미사 꾸준히 나오세요.”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 10,25-26)

한 과학 연구원이 아침 토크쇼에 나와서 자신이 연구한 제품을 소개하고 그 제품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 말을 신뢰할 것이고 행여나 그것이 어떤 식품이라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 연구원이 말하는 것을 모두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과학의 힘’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과거 원자력이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에 사람들은 빛나는 그 물을 엄청난 효험이 있는 약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사서 마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 뿐입니다. 그 대상을 올바로 분별해서 믿는 게 아니지요. 우리가 믿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지성을 총동원해서라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믿을 이유를 모든 곳에서 찾아내지요.

제가 어린 시절만 해도 유에프오가 유행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과학적 근거든 끌어와서 유에프오를 실존하는 것으로 만들었지요. 대부분의 사진은 조작된 것이었음에도 그 시절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계를 넘어서 다른 존재에 우리와 같은 지성의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쓰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그것이 그 시절의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유에프오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때그때마다 주제들이 떠오르고 그리고 그런 주제들을 얼마간의 우리의 관심을 끈 후에 다시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주제 가운데 하나처럼 ‘신앙’의 문제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주제들도 다른 여느 주제들처럼 잠깐 반짝하고 우리의 관심을 끌다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마치 우리가 그 주제를 이미 다루었으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만 일 년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사도11,26)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고 다닌 시간은 몇십년이 아닙니다. 고작 공동체별로 몇 년, 더 짧게는 몇개월, 심지어는 며칠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찾았고, 그들을 만나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변화되었지요.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시간을 본당 활동에 헌신합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잔치가 되고 말지요. 우리끼리의 행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늘 모인 사람들이 또 모여서 매년 하던 일을 반복하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말씀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이들이 말씀을 접할 기회를 찾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솔직히 말하면 사제는 사제대로 힘이 빠져 있고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힘이 빠져 있습니다. 사제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을 앞에 둔 채로 마치 중소기업 사장처럼 되어가는 중이고 신자들은 의무의 굴레를 쓰고는 별다른 기쁨 없이 일상적 행위를 반복하는 중이지요. 그러한 가운데 수도자들은 교회 안에 성령의 힘을 불러오기 위해서 진심으로 스스로를 봉헌하고 기도하고 희생하기보다는 자신들 수도 공동체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고심하고 내부적인 소소하고 일상적 갈등으로 기력을 다 빼는 중입니다.

고작 일년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이끄는 사도들과 수년 동안 같은 본당에 머무르면서 별다른 열매 없이 현상유지에만 만족하는 우리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여기서도 늘 하던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믿음이 강하고 우리는 지금 왜 이런 현상에 시달리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을 보았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나아가 부활하신 그분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 상급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그 믿음의 체험이 많이 퇴색되어 버렸지요. 우리는 주님을 본 적도 없고, 환시로도 뵌 적이 없으며, 그래…

순수한 선행

우리가 하는 선행의 가치는 선행의 규모로 따지는 게 아닙니다. 어느 회사에서 라면 1000상자를 주었다고 해서 그 선행이 ‘위대한 선행’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회사는 그런 선행 이후에 그 업적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충분한 이미지 메이킹 효과를 얻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계산된 선행이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충분한 모티브가 되는 이상은 그런 종류의 선행(선해 보이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순수한 의도’로 분별됩니다. 한 어린아이가 정말 자신이 가진 것이 사탕 하나가 전부인데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가진 걸 나누기를 바라신다는 가르침을 받고는 그 사탕을 자기보다 없이 사는 친구를 위해서 선뜻 내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 순수한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면의 가치는 다른 것들에도 적용이 됩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수십일동안 정해진 특정 기도를 막연한 의무감에 바치는 것보다는 짧은 순간이지만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그 내면의 가치가 더욱 큰 법입니다. 물론 정해진 기도를 모든 순간에 진실하게 바친다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완벽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믿음 안에서 다른 이에게 선한 일을 행할 때에, 특히 그 대상이 그 무엇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할 때에, 나아가 그 대상이 심지어는 나를 미워하고 얕잡아보고 천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할 때에 그 선행의 심도는 더욱 깊어지고 우리는 더욱 완전한 이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살피고, 정말 나의 순수한 의도로 행해진 선행을 손꼽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돈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

돈이 될 만한 것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찰거머리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있으니 바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돈이 있는 곳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그곳을 향해 모여듭니다. 멀쩡하던 사람도 그 움직임을 보면 거기에 동참하기 시작하게 되고 돈을 사랑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빠가 돈을 좋아하면 그 마음은 언제나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엄마까지 돈을 좋아해 버리면 그 두 마음은 걷잡을 수 없게 되지요. 그런 가운데 아무런 생각이 없던 자녀들도 매일같이 하는 돈 이야기에 같이 돈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이런 종류의 움직임을 자신들 스스로 감지하기는 힘든 법입니다.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검소하게 잘 산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문제는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피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염증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피 자체가 썩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알게 모르게 우리를 돈을 향한 욕구로 이끄는 수많은 것들이 있으니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정신을 올바르게 챙기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되새기지 않는 영혼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흐름에 뒤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중립적’인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별로 열심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안심하는 영혼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미지근한 상태로 영영 머물러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훗날 입에서 뱉어버리는 운명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양 도둑 늑대 목동

간단하게 정돈하자면,
- 순진한 양
- 양떼 사이에 몰래 파고들어 훔쳐서 팔아 먹으려는 도둑
- 파멸시키려는 늑대
- 지키고 이끌려는 목동

이렇게 정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에 대부분은 양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양들 가운데에서도 무리 안에 있으면서도 한데 정신을 팔다가 도둑에게 낚아채이는 양이 있고, 또 늑대에게 파멸당할 만큼 홀로 외로이 떨어진 양도 있지요. 대부분의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그 목소리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목동이 알려주는 길은 쉽지는 않지만 천천히 따라가면 참으로 좋은 길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양들은 저마다의 호기심과 기호에 따라 걸어 다니다가 도둑에게 늑대에게 자신의 주권을 빼앗기고 맙니다. 뒤늦게 후회하고 목동을 외쳐 부르면서 그분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다가 찾아나선 목동에 의해 구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예 무리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더욱 튼튼한 양이 되었겠지요.

천상의 삶과 지상의 삶

천상의 사정을 말한다고 해서 이 땅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천상의 사정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지상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천상에서 배운 사정으로 지상의 일을 정의와 공정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난해함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영적이고 거룩한 것과 맞닿아 있는데 우리의 발은 땋에 닿아 있으니 우리는 마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인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그저 천상 사정에만 익숙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얼마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복을 직관하고 지상의 그 어떤 것에도 유혹을 받지 않는데 어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땅에 발을 대고 있기에 우리는 지상의 사정에 영향을 받고 그래서 천상의 사정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을 받고 죄에 넘어지며 그래서 더욱 천상을 그리워하고 그 기쁨을 갈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지상의 삶은 ‘여행’과도 같습니다. 다행히도 끝이 존재하지요. 우리는 지상에 머무는 동안 이 여행을 충실히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자유를 열심히 단련한 뒤에 훗날 하느님에게 돌아가면 하느님은 우리를 더욱 큰 기쁨으로 감싸 주실 것입니다.

사목회의

어제 사목회의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회의는 이러저러한 ‘행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본당 축제와 견진, 첫영성체... 모두 한 시기에 우루루 모여서 하고 끝내는 행사에 불과하지요. 우리는 보다 깊은 내면의 방향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알고 보다 나은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올바른 방향 설정을 해야 하지요.

우리는 더는 본당 안의 일에만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방향은 밖으로 향해야 합니다. 내 품에 들어온 이들만을 살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구원관입니다. 우리는 울타리를 쳐 놓고는 잡아놓은 양들이 빠져나가지 않게만 안달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보다 밖으로 향해 잃은 양들을 구원할 사명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의 ‘양성’이 최우선이겠지요. 우리가 먼저 말씀 안에서 자라고 성장해 내면을 다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제가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여러분들을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헌데, 그러려면 핵심이 뭔지 아십니가? 여러분들이 먼저 마음을 맑게 가꾸어 두는 것입니다. 맑은 마음을 지닌 사람은 제가 원하는 것을 이해하고 함께 동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마음부터가 어두우면 아무리 좋은 것을 시도하고 노력해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봉사자 여러분, 먼저 개인의 회개를 하셔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모든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사를 멋들어지게 한다고 해도 거기에서 얻어지는 결과는 찰나적인 것이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회개를 통해서 나아가 전체 공동체의 진정한 변화에로 서서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여기서 일할 시간은 이제 1년하고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에 무슨 눈에 보이는 거창한 결과를 이루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씨를 심어 놓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도와 주십시오.”

깨닫지 못하는 이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0,6)

우리라고 깨닫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여전히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자들의 삶은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은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무언가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즉, 내 안에 증오가 일어나는 마음을 어찌해볼 생각은 않은 채로 상대가 바뀌기를 바랄 뿐이지요.

예수님의 우리의 목자라는 말, 그분이 우리의 문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뭔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느끼고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분이 문이라고 해놓고는 전혀 엉뚱한 문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나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보호막 속에 자라온 순진한 사제라서 세상의 현실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머물고 있는 곳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 안에서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느 환경에서든지 적응해서 살기 마련이고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놓치면 안된다고 말이지요.

돈이 많건, 돈이 적건 증오하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누군가는 주택에서 증오하고, 누군가는 초가집에서 증오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내면의 움직임은 겉모습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이야기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돈이 많으면 나름 배우는 게 많아서 더 교양있게 살 수 있고 천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무엇을 배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정말 배운 이들이 지성과 교양을 올바르게 갖춘다면 그들은 보다 내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배운 이들이 더욱 교만에 사로잡혀 아주 작은 성가심도 견뎌내지 못하는 경우를 더 많이 관…

종교혼합주의

진지한 성찰 없이 다른 종교에 다해서 뭐든 진리는 통한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진리를 알아서 그 말을 하기보다는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진리를 지니고 있는지 올바로 인식하지 못해서 그냥 좋아 보이는 모든 가치들을 혼합해 보이는 셈이지요. 멋들어진 요리를 못만드니 꿀꿀이죽을 만들고는 배고프면 다 맛있다고 우기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핵심은 다른 종교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신앙이고 부활 신앙입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있었지만 죄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없었으며, 죽었다 깨어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처럼 전혀 새로운 견지를 열어 보이는 부활은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않기

방금 사무원이 찾아서 나가 보았습니다. 한 아줌마가 왔는데 유아 세례를 받을 때 출석을 체크하는 종이에 아무런 체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가서 직접 확인해 보았습니다.

- 배운 걸 기억하십니까? 혹시 어제 제가 뭘 가르쳤는지 기억하십니까?

- 술 마시지 말라고 가르치셨어요.

어제는 한시간을 내내 성사에 대해서 가르쳤는데 결국 아줌마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술 금지령’ 뿐이었나 봅니다. 나머지 배운 것들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으로 허탈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해가 갔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이는 마치 고등 수학을 유치원생들 앞에서 최대한 쉽게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한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에는 1, 2, 3이나 배우면 다행인 거지요.

그러나 여기서 실망하면 안되겠지요. 그 중의 한 영혼이라도 무언가 배워서 삶이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크나큰 수확일테니까요. 한 영혼이라도 저와 같은 열정을 지니게 되면 그도 자신의 일을 시작할 테니까요. 그러면 두 명이서 다시 두 명의 새로운 영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되겠지요. 그렇게 두명이 네명이 되고, 네명이 여덟명...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지만 일단 제가 있는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요.

결국 ‘말’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삶’으로 가르쳐야지요. 제가 하루하루를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열정을 가지고 하느님에 대해서 부르짖다보면 그 중에 한 두어명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니까요.

하고 싶어 하는 것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건 능력이 되는 대로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착각하는 것도 능력이 되는 대로 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이 되기까지는 진지한 성찰과 익숙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바로 그 때문에 그러한 것들은 ‘하기 싫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저 자신에게 편하고 좋은 것만을 하고 싶어 하고 그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땅히 해야하는 사랑은 언제나 뒷전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편안한 사랑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기호'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고 생기있고 부유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늙고 냄새나는 노인에게는 다가가기도 싫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비와 정의

여러분들이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처음에 순수하게 이 세상을 만드셨고 온전히 ‘사랑’으로 그것을 돌보셨습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갓난아기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기에 해 줄 수 있는 일은 사랑을 쏟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지혜가 자라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의 마음대로 표현할 즈음이 되면 그때부터 어른들은 두 가지 것으로 아이를 돌보게 됩니다. 하나는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자비’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온유와 사랑으로 아이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매번 그런 식의 방식에 아이가 익숙해져 버리면 그때부터는 ‘자비’를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오만방자해 질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정의’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아이의 잘못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시대는 ‘자비’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잊은 채로 살았고 하느님에게서 떨어진 생활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돌보고 계신 것이지요. 다시 예언자를 보내고 다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마감이 되는 순간에는 당신의 정의가 온 세상을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이 행한 것들 때문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마냥 이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간다고 여전히 어둠에 빠져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행여 그런 영혼이 우리 자신이 아니게 되길 바랍니다. 그분의 정의는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분의 자비를 허비한 이들은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의 정의는 어떠한 형태일까요?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에 뒤덮인 재림을 언급하셨습니다. 법정에서 심판관 앞에만 서도 초라해지는 …

하느님을 모르는 영혼

하느님을 모르는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의 영혼은 불이 꺼진 방처럼 어둡고 칙칙하고 음험하기 때문이지요. 그는 자신의 내면에 진정으로 빛을 가져다 줄 대상을 모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영혼은 자신의 공허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에 늘 그런 공허를 채울 다른 대상을 물색하고 다닙니다.

보다 맛있는 음식, 자신의 허영을 채워줄 수 있는 화려한 옷, 사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대와 쾌락을 채우기 위한 섹스, 술,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 그들은 그러한 것들로 자신을 채워 보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게 되고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더 많은 쾌락’

그래서 자연 더 많은 돈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돈이 없더라도 명예나 권력이 그러한 것들을 보장해주기도 하니 그들은 자연스레 그러한 것들의 친구가 되어갑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위스키를 마시는 것을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식사의 진정한 가치인 친교와 나눔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셈입니다.

그들의 공허한 내면은 아무리 외면을 꾸민다고 해도 숨길 수가 없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표정에서 드러나지요. 정치인이 아무리 대중적인 자리에서 웃음을 연습해서 보인다고 해도 그의 일상에서 드러나는 표정까지 24시간을 관리할 수는 없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늘 뭔가 불만스러워 보이고 무언가에 증오할 대상을 물색하는 데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 순간만큼은 표정이 밝아지지요. 아, 물론 그것을 손에 넣을 때에 말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빛을 비춰서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일이지요. 그들은 처음부터 거부하기 시작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신들 안에 쌓여있는 어둠이 너무나 엄청나서 거룩한 말과 행동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선행은 번번이 악으로 돌아오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

다른 교회에 다니는 가족

- 가족 중에 다른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제 한 교리교사가 질문한 내용이었습니다. 듣는 순간 대답했습니다.

- 사랑하세요.

그리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 사랑하셔야 합니다. 가장 우선은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살펴보셔야지요. 만일 그 가족이 당신의 자녀이고 어린아이라면 당신은 가톨릭 신자 부모로서 자녀에게 자신이 지닌 좋은 신앙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가르쳐야지요. 왜 내가 가톨릭 신자인지,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의 좋은 점은 과연 무엇인지? 교회와 성사는 무엇인고 우리 신앙의 근본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자녀가 이미 장성한 성인이라면 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즉, 그가 당신의 삶을 보고 스스로의 신앙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지요. 그때는 여러분들이 말로 성당에 가자고 하는 것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평화롭게 자신의 신앙 안에서 참된 길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하지요.

그 가족이 친지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다른 교회에 다니고 별다른 마찰이 없다면 존중해야 합니다. 다만 여러분들은 ‘좋은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야 하지요. 그들이 비난할 것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들이 엉뚱한 이론으로 우리 교회를 향해서 비난하는 말을 던질 때에는 ‘아주 차분한 어조로’ 그들에게 그 주장의 오류에 대해서 합당하게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성모님에 대해서 근거없는 비난을 하고 가톨릭 교계 제도에 대해서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합당하게 대답해 줄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약한 부분이지요.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사실 대부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꾸준히 사랑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삶에서 ‘빛’…

교회의 문

문은 두가지 용도로 쓰입니다. 안에 있는 것을 지키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문을 ‘지키는 용도’만으로 쓰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우리는 갈수록 폐쇄적이 되어가고 ‘더는 잃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쓸 뿐입니다.

우리가 밖에 있는 것이 들어오게 하는 용도로 문을 쓰기 시작하면 우리는 보다 현명해지고 적극적이 됩니다. 밖에 있는 것들 중에서 들어올 만한 것을 들어오게 하면서도 정말 위험한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명하게 문을 열면서 필요한 이들이 안에 들어와 보화를 마음껏 누리게 도와주게 되지요.

우리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으로 풍부한 자원을 얻게 되면 더욱 많은 문을 얻게 되는 셈이고 더욱 많은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교회는 굉장히 폐쇄적이었고 안주하는 교회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을 돌본다고 정신이 없었고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만 노력을 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바깥에 있는 것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안에서 풍부한 양식을 먹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바깥에서 굶주리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군주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빗장을 열어 만백성이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분이십니다. 헌데 문지기에 불과한 우리가 그 빗장을 걸어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만 대고 있다면 훗날 우리는 바깥에 남겨진 수많은 영혼들의 구원에 대해서 합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요한 3,2)

하느님은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가 된다는 의미는 그분과 함께 머물고 그분의 좋은 것을 모두 누리며 그분의 사랑을 담뿍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신뢰합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부모의 영향력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부모가 지닌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입니다.

우리의 자녀됨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그분의 자녀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특정한 예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예식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 그 시작점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어느 예식만 받았다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이들은 훗날 더 큰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압니다. 사랑이 좋다는 걸 알고 사랑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요. 그러나 사랑이 쉽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사랑은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결단을 내리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가난한 이가 굶주리게 두면서 ‘기도 하겠습니다.’라고만  한다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기도행위’를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사랑한다면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포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받은 카리스마가 기도 외에는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기도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여전히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이상은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한 법입니다. 제 아무리 봉쇄 수도원이라도 곁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그분의 사랑을 한껏 받고 나누어주는 자녀들입니다. 사랑 안에 머물러서 하느님의 자녀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노력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이름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그리스도교는 사실 외적인 형태로만 보자면 지극히 독선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어느 종교도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자비심을 강조하고 서로 온화하게 잘 지낼 것을 강조합니다. 유교는 그 고유한 철학으로 만물의 조화를 꾀합니다. 헌데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독선적이고 교만한 발언이랍니까?

하지만 이는 ‘예수님’을 올바로 조명하지 않은 탓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올바로 생각하지 않은 채로 단순히 입으로 발음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만을 섬기기에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분의 이름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단순히 외적 형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존재는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관문이 됩니다.

사실 짧은 이야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전체 구원의 역사를 조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을 쏟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궁극적 사랑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분을 통해서 다시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말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 시대 이전에 죽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덕분에 크나큰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보일 뿐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별달리 바라볼 수 있는 것이 …

내 양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요한 10,14)

우리는 우리의 목자를 압니다. 목자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인지하고 그분이 하는 일을 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정도의 교리상식은 악마도 가지고 있습니다. 악마도 예수님만 보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여!’라고 고함지르고 다닌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의 의미는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어느 양이 자신의 목자가 부르는데도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양은 그 목자를 신뢰하지 않는 셈이고 그 목자를 전혀 모르는 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는데도 많은 경우에 모르는 척을 합니다. 헌데 우리가 어찌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직장일이 너무너무 바빠서 잠시도 성당에 나와 하느님을 찬미할 여유가 없는 사람, 텔레비전을 볼 시간은 있지만 기도에 마음을 쏟을 수 없는 사람, 자신이 하는 취미 활동에는 온갖 열성을 다하면서도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봉사활동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 회식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면서 청소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이들, 자신을 위해서는 수십만원을 거침없이 쓰면서 길에서 걸인을 만나면 천원 한 장에 바들바들 떠는 이들... 그들은 자신의 목자의 목소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목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요.

우리 주님은 착한 목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헌데 우리는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에 작은 돌부리가 있다고, 가시밭길이라고, 오르막이라고 해서 그리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쉽고 편한 길로 이끌려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더 신뢰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그분이 이끄시는 풀밭으로 갈 준비가 된 걸까요? 우리는 그분의 양떼인 것일까요?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요한 10,16)

양들이 우리 안에만 있으리라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양들은 순진해서 또 때로는 스스로의 오류로 우리 밖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작 도움이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양들이 아니라 우리 밖의 양들입니다.

우리 밖에는 온갖 위험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양들이 완전히 잡아먹혀 뼈도 추스리기 전에 얼른 우리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야 합니다. 헌데 우리 안으로 양들을 데려오려면 누군가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가 우리 밖에 나갈 것입니까?

여기에서 생각을 잘 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누가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까? 단순히 우리 근처에 있는 이들이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목자가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된 이들’이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단순히 우리 근처에 머무른다고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게 아닙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우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들 자신이 방향을 상실할 수 있는 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또 목자가 우리 밖으로만 나다니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훈련시켜야 하고, 준비된 양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목자 자신도 우리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모범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양들에게 그 짐을 지우려고 하면 양들이 그의 말을 신뢰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밖으로 나가 양을 데려오기는 커녕 도리어 양우리를 단속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우리 안에서 자신들만의 축제를 벌이는 경우가 있지요. 심한 경우에는 밖에 있는 양들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기도 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살찌워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근처 최전선에 머무르는 양들, 우리 밖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양들을 파견해서 잃은 양들을 불러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양 무리가…

삯꾼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 10,12-13)

허용 범위 안에서만 일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진 범위가 아니면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으려는 이들이지요. 이들의 직분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즉, 이들이 공무원인지, 의사인지, 교사인지, 사제인지 수도자인지, 구역반장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안에 숨어있는 의도입니다.

자신에게 의무적으로 지워진 범위 외에는 신경쓰지 않으려는 이들을 우리는 관공서에서 흔히 만납니다. 이들은 철저히 자신의 범위 안에서만 일할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월급을 받고 일하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모습입니다. 만일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공연히 일을 더 하려고 하다가는 도리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일을 시키는 주인이 그런 그의 모습에 길들여 질 것이기 때문이고 합당하게 자신의 보수를 받고 정당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업무를 과중시킬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목자’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 삯꾼처럼 일한다면 큰일입니다. 목자라는 직분은 삯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을 올바로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즉 양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가 가정에 머무르는 시간을 정하고 아내와 자녀들과의 관계 안에서 ‘해야 할 일’만 정해 놓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관계는 참으로 냉정하고 차갑고 건조할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는 없기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목자’들은 존재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무슨 대단한 모습으로 드러나는게 아닙니다. 게릴라들이 총을 들고 쳐들어와서 목자더러 나오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드라마틱한 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일부입니다. 보통은 아주 작은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월요일은 난 죽어도 쉬어야 …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출생에서 죽음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일어나는 삶의 여러가지 정황들입니다. 인간에게 불확실한 것은 출생 이전과 죽음 이후입니다. 그리고 삶의 여러가지 것들도 실은 불확실한 것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확실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보이는 선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것이 ‘현세’라고 불리는 것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입니다. 인간은 현세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려는 강렬한 욕구 때문에 현세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유통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바로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이지요. 미모를 추구하는 이유도 그것이 곧 명예와 권력에 연관되고 그로 인해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단정하고 고운 모습이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만족시키는 과한 미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형이 성행하고 값비싼 메이커 화장품들이 더 잘 팔리게 됩니다. 건강을 추구하는 이유도 하느님의 뜻에 맞게 봉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벌어놓은 것을 잘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추구하는 건강은 ‘과도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건강을 찾는 것이 보통이지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 확실한 것들 안에서 바라보는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모의 씨앗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알지만 우리 안에 그 씨앗과는 동떨어진 어떤 존재, 영혼이라는 것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계산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보다 더 복잡미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이라는 현상은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것입니다. 누군가는 정말 오래 살고 싶어하는데 일찍 떠나버리고, 누군가는 제 명을 다한 것 같은데도 생명을 유지하고, 결정적으로 그 누구도 자신이 정한 때에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은 갖지만 그것을 설명할 사람을 이 땅의 살아있는…

선교사와 일

선교지에서는 딱히 정해진 일이라고는 ‘미사와 성사’ 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일은 전부 선교사의 역량대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을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루라는 시간 동안 일을 잘 배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터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부터 많은 생각들이 갈립니다. ‘민중’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교회’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외적 지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적 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참으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지요.

하느님은 사실 그 모든 이들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누군가가 지어놓은 성전에서 내적인 양성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내적으로 성장한 공동체에 와서 큰 어려움 없이 건물을 지어 올리는 사람도 있지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회가 가르치려는 바를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모든 일이 똑같은 셈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일에는 ‘농도’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그 수많은 일들 안에는 저마다의 ‘농도’가 존재합니다. 그 농도라는 것은 바로 사랑의 깊이를 말하고 그 사랑은 두 가지 뚜렷한 방향성을 지닙니다.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방향이지요.

성당 안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기도회를 한다지만 실제로 그 목적은 거기 모인 이들이 내는 헌금에 관심이 있는 거라면 그 기도회의 주체자는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자회를 하는데 정말 가난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라면 그 바자회는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바자회가 되는 것이지요.

건물을 지어도 정말 필요에 의해서 거룩한 뜻에 의해서 지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서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는 신기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지어진 집을 통해서도 작용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저마다의…

어머니

어머니의 최고봉은 단연코 성모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연상하며 모십니다. 물론 하느님은 아버지의 가장 완전한 모습이시지요. 그리고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안에는 당연히 가장 완전한 어머니로서의 모습도 존재합니다. 세상을 낳으신 분이시고 돌보고 계신 분이시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약점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 대한 부분이 부족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교회에 어머니를 선사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이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성모님에 대해서 찾아볼 수 있는 성경의 부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지극히 조용하셨던 분이시고 성요셉 성인을 사랑하셨으며 예수님의 어린 시절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음에 품고 깊이 묵상하셨고, 아들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면서도 그분의 신적 권위에 순종하셨으며, 십자가 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셔야 했고,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를 아들로 맞아 돌보시고 돌봄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헌데 단순히 성경 안에만 어머니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십니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교회의 어머니로서 우리들 앞에 직접 나타나시기도 하셨습니다. 수많은 발현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성모님을 직접 뵈었고 교회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것만 해도 과달루페, 파리, 라 살레트, 루르드, 파티마, 바뇌의 6곳이나 되고 비공식적인 것만도 수백건이 넘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에 대해서 알고있는 대표적인 교리는 무염시태(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천주모친(하느님의 어머니), 동정잉태(성령으로 잉태하심), 몽소승천(당신의 육신과 더불어 하늘로 오르심)입니다. 이는 모두 교회의 전승과 당신의 발현 속에서 알려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다른 교회 신자들은 동정잉태 외에는 인정하지를 않고 있지요. 지금은 성모님의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니 이정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아내’의 모범과 ‘어머니’의 모범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

예수님의 두번째 방문

예수님의 첫 방문은 지극히 겸손한 어린 속죄양의 모습이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을 당신의 자비로 구원하기 위함이었지요.
하지만 당신의 두번째 오심은 영광에 휩싸인 심판관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구원을 희망하겠지만 이미 수많은 기회를 낭비하고 난 뒤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 진리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다고 착각하지요. 선한 일은 커녕 악한 일이나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우리는 많은 경우 다투고 싸운다고 바쁩니다.

은총에 따르는 희생

영어를 배우면 쓸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영어를 배우는 고통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제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실제적인 희생과 봉사의 삶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얻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은총에 상응하는 우리의 희생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일을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절대로 헛되이 소비되는 적이 없습니다.

영적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다른 이를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일 신경쓰는 것만도 바쁩니다. 장난질이나 하다가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요. 어린아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드뭅니다.

영적 어린아이는 남을 위해서 헌신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영적 어린아이는 자신의 영적 발전을 신경쓰는 것만도 바쁘지요. 엉뚱한 일에 신경쓰다가 엇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지요. 영적 어린아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드뭅니다.

몸은 어른이지만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어린아이도 어린아이 나름이지요. 갓 태어난 아이가 있는가 하면, 잘못 길러진 아이가 있고, 그리고 충실하게 길을 걸어나가는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아직 지도가 필요한데도 남을 가르치려는 어린아이도 있고 이제는 충분히 제 힘으로 일어나야 하는데도 여전히 입에 밥을 떠넣어 주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도 있지요.

저는 분명히 어린아이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내적 문제도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다른 넘어진 친구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바짓단을 털어주는 정도의 일을 할 정도는 됩니다. 그것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고 연약한 심장을 지닌 아이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 ‘하늘’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설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강렬한 햇볓이 쏟아지고 구름과 우박이 떨어지며 천둥과 번개가 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을 떠올리면서 그 자체로 하느님의 위엄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늘 그 자체가 하느님의 지고하심을 상징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과학이 발전을 하고 사람들이 사물들의 속성을 알게 되면서 ‘하늘’이라는 의미는 점차적으로 그 의미를 상실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더는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의 위엄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을 위로 있는 공간일 뿐입니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과거 아버지란 존재는 위엄있고 권위있고 가정의 우두머리로서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아버지’라는 존재는 참으로 초라해져버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 의미를 동시에 그 깊은 뜻까지 밝혀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늘의 심오함,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고 가시적인 범주를 벗어난 그 위엄을 합당하게 드러내어야 하고, 아버지의 자상함과 권위를 아주 깊은 부분까지 잘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결국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 결론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땅’을 넘어서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땅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표면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가시세계와 일상적인 차원의 일들을 의미하지요. 그분은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보다 넓은 뜻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의 피상적인 사고를 훨씬 뛰어넘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분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사는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이미 그 생각은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생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숱한 관상가들은 제 나름대로 바라본 하느님의 모습을…

예수님의 고통의 의미

어제 세례 교육에서 가르친 내용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을 통해서 육체적 고통만을 겪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오입니다. 예수님은 몸의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영의 고통을 더 깊이 겪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로부터의 배신, 수많은 제자들의 도망, 그분을 환호하던 군중의 분노와 멸시와 모욕, 권위있는 자들의 무책임함과 악의, 사랑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 그분의 영혼의 고통은 그분의 육체적 고통보다 더욱 깊이 그분을 내리누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십자가를 지셨지요. 십자가는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면 누군가는 치워야 합니다. 버린 사람이 치우는 게 맞지만, 통상적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지요. 다른 누군가가 ‘희생’을 하면 그 쓰레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었지만 기꺼이 그 희생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지요. 그분의 자발적인 내적 외적 고통이 그분을 진정한 구세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요. 세상을 구원하는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 중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남들이 나를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발언을 하면 자존심을 상했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노력을 하지요. 그러한 노력들 가운데에서 때로는 어리석게도 상대를 비방하고 비난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자존심이 회복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존심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어리석은 행동이 나오는 것이고, 그 가운데에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복수심’입니다. 내가 당한 그대로 너도 당해 보라는 생각이지요. 예수님이 참으로 안타까워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 이렇게 남겨 두셨지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는 우리가 행한 그대로 돌려받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에게 굳은 정의를 집행하는 자는 자기 자신도 그 정의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 상대에세 용서를 행한 이는 자신도 용서받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부여하신 것이기에 지켜야 합당한 것이지요.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진 자잘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밖의 것들은 잘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턱대고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작은 감정의 흔들림에도 자신의 정체성이 함께 흔들려버리는 나약한 존재로 남고 맙니다.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이 장상이 나에게 하는 정당한 명에도 나의 기분이 상해 버리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 때에는 나는 길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는 셈이지요.

딸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아버지가 딸의 복장을 두고 조언을 하는 걸 두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는 딸이나, 정당하게 무언가를 시키는 신부님의 말투가 맘에 안든다고 자존심이 상했다…

어린 아이들을 위한 축복식

오늘 아침에 있었던 학교 축복식에는 아주 조그만 아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 학생 여러분, 만일 제가 술주정뱅이였다면 여러분들이 여기 저를 부르셨겠어요?

- 아니요~!

- 맞아요. 술주정뱅이는 학교에 초청할 필요가 없지요. 오히려 멀리했을 거예요. 제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이 저를 필요로 할 정도로 저에게 준비된 게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요?

- 네~!!

- 맞아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을 준비해야 해요. 지금 여기에서부터 여러분들의 미래는 결정되어 가는 거예요. 만일 선생님이 숙제를 내어주는데 귀찮다고 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나중에 미래에 가족과 머무르는 시간에도 마땅히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을 귀찮다고 하지 않게 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 이 학교에서부터 선생님에게 순명하고 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해내는 학생은 나아가서 자기 가정에서도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책임을 다하는 학생이 될 거예요. 아시겠죠?

- 네~!!!

억지 선택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을 때에 우리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쪽의 길이 막혀서 억지로 다른 쪽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 놀 만큼 다 놀고 늙어서 더는 힘이 없어서 놀지 못해서 이제부터는 신앙생활에 헌신하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헌데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늙어서도 우리의 선택의 여지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머무는 사람과 사랑을 할 수도, 꼬장꼬장한 고집을 부리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자신의 덕을 마련하지 못한 어르신들은 늙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고 독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노인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일 없어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가치를 훼손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일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술을 실컷 마시고 간염이나 간암에 걸려 술을 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을 때에 미리미리 준비하고 마련하는 것이 칭찬받을 일이지요.

치유와 그것을 이루는 손

하느님께서 낫게 하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손으로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바로 내 곁에 있는데 기도만 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슬픔과 아픔 앞에서 실제적으로 움직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 안에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실제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기도도 더 절실히 하게 됩니다.

현시대와 스테파노

어제는 저녁미사 강론 시간에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다시 제1독서의 첫 부분을 읽었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 여러분은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사도 7,51-53)

그리고는 다시 정색을 하고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만취, 음행, 간음, 탐욕 등으로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아버지의 죄는 그대로 자녀에게 영향을 주고 그 자녀는 다시 성장하여 어른이 되니 죄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사자의 말을 듣고도 그걸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말했지요.

“만일 스테파노가 여기 있었다면 이와 같이 부르짖지 않았을까요?”

스테파노의 목적은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스테파노의 마지막 말에도 잘 나타납니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사도 7,60)

예언자들이 활동하는 목적은 사람들이 다시 하느님에게 돌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자신의 내면에 쌓인 어두움을 깨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진리를 선포하는 목소리’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진정한 예언자는 박해를 피할 수가 없는 것이 기본입니다. 어둠에 가라앉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 따뜻한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고상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의롭지 못하고,…

자유의 봉헌

자유의 봉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고대로부터 현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능력에 대해서 버거워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별로 없지요. 그냥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자유를 행사해야 할 영역이고 어디부터 자신의 본능에 묶여 사는 것인지 분별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그리고 이런 상황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고 바쁘지요. 그러나 때로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면 지금 이대로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셈이지요.

자유에 대한 인간의 추구는 뿌리깊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현인들을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사람들에게 ‘중심’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고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우리를 초월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바탕이었고 그 바탕 위에서 과연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흐름이 깨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존재 여부도 의심스럽기 시작한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선택을 이루어 나갈지, 아니면 아예 신을 부정하는 것부터 시작할지를 선택해야 했지요. 그리고 그런 연구는 양측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신을 수용한 이들은 신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정립했고, 신을 거부한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가 필요했지요. 아무리 신이 없어도 이웃이 그저 자유로운 행위라며 이유없이 나의 뺨을 때리는 것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세상의 법체계도 발전해 나간 셈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모든 흐름들이 이곳 저곳에서 짬뽕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무신론 가톨릭 신자도 있고, 유신론 비신자…

누가 더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어리석다고 합니다. 충분히 자유롭게 살 수 있는데 믿음이라고 부르는 허황한 사고의 관념에 묶여 자신들처럼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묻습니다. 무엇이 과연 자유로운 삶입니까? 그들은 무엇을 두고 자유로운 삶이라고 합니까?

그들은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서 마음껏 사랑하는 것을 자유롭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그 사랑은 육체적인 관계를 의미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의 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들은 마치 여러 사람들과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면서 체험을 늘려가는 것을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묶인 노예들일 뿐입니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의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온 생을 헌신하지요. 그렇게 충실한 배우자가 되어가고 훗날 가정의 평화를 꾸립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마음껏 노는 것을 그들은 자유롭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은 그들의 내면의 공허를 헛되이 채우려고 이런 저러 것들의 힘을 빌리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내면에 진솔한 빛과 진리가 필요한데 그것을 술과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내어 맡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공허의 노예들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분별해 내지 못한 이들이지요. 반면 하느님의 사람은 절제와 더불어 모든 것의 참된 의미를 즐기고 나아가 그 내면을 진리의 빛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그들은 돈을 잔뜩 벌어 이것 저것 마구 사대는 것을 자유롭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비의 노예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이 아니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하지 않은데도 가진 것이 늘어나면 그것을 위해 신경써야 할 일이 늘어날 뿐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탐닉하는 물건들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노예들이 되어갑니다. 값비싼 걸 사서 그것을 섬기느라 거기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지요. 그러는 동안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 …

단상

어둠이 더 왕성히 활동하니 빛을 비추는 측에서도 더 열심히 해야지요. 그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니까요. 어둠은 싸우게 만들고 빛은 사랑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쉴 생각만 해서 되겠습니까? 관상생활의 우아함이라구요? 참나... 그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믿음이랍니까? 관상생활이 우아하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사람이 관상에 접어들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일순간에 무시하고 '조용하게 수도원이나 들어가고 싶다'라구요? 수도원이 생각처럼 조용한 곳인줄 아십니까? 아마 들어가보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멋대로 상상하는 수도원은 발리의 해변가나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이 오히려 더 가깝습니다. 거기서는 별달리 할 일도 없고 휴가 기간 동안 먹고 쉬고 관광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을 휴가를 위해서 나온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학교'입니다. 기회가 되는 동안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나중에 그것을 써먹어야 하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요? 자신이 대학 교수라고, 전문 직업인이라고 이미 충분히 배웠다고 착각하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가장 배우지 못한 이들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에는 겉으로 내세울 수 있는 스펙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실제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엄청나게 더 풍부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셈입니다. 대학원 박사 과정을 따고서도 그 교만 때문에 내 가족 하나 올바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의 그 스펙이 무슨 소용이랍니까? 차라리 겸손하고 우직하게 제 할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일치를 꾀하는 시골 노인이 더 지혜로운 법입니다.

성적표

https://www.youtube.com/watch?v=fTv8tNjHi1c

수요일 7시였다. 아들의 학교에 정각에 도착했다.

- 모임에 나오는 것 잊지 마세요. 의무사항이에요.

아이의 공책에 선생님이 쓰신 글이었다.

- 제길, 선생님은 뭘 생각하는거야? 선생님이 말하는 시간에 우리가 시간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8시 반에 가진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더라면 그러지 못했을텐데, 엄청 중요한 계약 자리였는데, 취소해야 했다구!

모임 자리에는 엄마와 아빠 모두 나와 있었다. 선생님은 정시에 시작해서 우리가 참석해 준 것에 고마워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난 이 계약을 어떻게 해결할까를 생각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 계약으로 받게 될 돈으로 새로운 텔레비전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후안 로드리게즈!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 후안 로드리게즈 아버님 안계신가요?

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 네, 네, 여기 있어요.

급하게 대답하면서 아들의 성적표를 받으러 나아갔다. 의자로 돌아와서는 받아든 걸 보았다.

- 내가 이것 때문에 여기 온거야? 대체 이건 뭐...?

성적표를 얼른 집어 넣어야 했다. 다른 이들이 엉망 진창인 내 아들의 성적표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화가 더 나기 시작했다.

- 다 주잖아!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잖아! 이제 아들내미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군!

도착해서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쾅 닫고는 고함을 질렀다.

- 후안 이리 나와!!!

후안은 자기 방에 있었다. 그리고 나를 포옹하러 달려나왔다.

- 아빠 도착했구나!!!

- 무슨 아빠 같은 소리야? 빌어먹을 자식!

애를 떨쳐버리고 허리에 벨트를 풀어서 몇차례나 아이를 때렸는지 모른다. 때리면서 아들놈에 대해서 생각한 걸 고함을 질렀다.

- 이놈! 이놈! 이놈!!!! 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야. 멍청한 자식! 소용도 없고 쓸모도 없어! 아주 부끄러워 죽겠구만!!!!

후안은 울면서 돌아갔…

가짜 신학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 사실에 근거하며 다 합당하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지닌 분노와 악의는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는 살리려는 게 아니라 무너뜨리려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마음을 품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인 사람은 가장 악한 의도를 지닌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악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완벽한 논리성으로 스스로를 무장할 테니까요.

예수님 앞에 선 율법 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연합했고 결국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바를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찾았으면서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정반대로 그분을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만난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논리성으로 무장하고 예수님을 공략했습니다.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두고 예수님에게 대들었고, 죄많은 탕녀를 앞에 두고 예수님에게 어떻게 할거냐고 함정을 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지요.

수난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연합했고 그 가운데에는 가장 똑똑한 이들이 있었고 당대의 신학자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악의와 시기심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공략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부답이었고 다만 진리를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훗날 구름을 타고 다시 올 것을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눈이 먼 그들은 바로 그 발언으로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은 그 속내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흉하게 감춰진 속을 충분히 알고 계시는 하느님은 그에 가장 적절한 준비를 갖추실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런 그들의 악의를 처벌하지 않고 두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회개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빵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그러나 사람들은 배고파하고 목말라합니다.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채로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찾고, 통상적으로는 서로 간에 그것을 찾습니다. 바로 ‘관심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타인의 사랑이 나를 채워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믿었던 이의 약점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더 많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배신감으로 인간을 경계하게 되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이웃들을 선물하신 게 아닙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변덕스럽고 감정에 휘둘리며 선한 생각을 하다가도 악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완벽하지 않은데 왜 우리는 타인에게서 완벽을 추구하려 하는 걸까요? 그들은 나에게 잘 해주다가 못해주기도 하고 좋은 것을 베풀다가 고난을 안겨다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결국 우리는 인간에게서 완전한 행복을 찾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에게서 그것을 찾아야 하고, 하느님의 유일한 외아들에게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입니다.

아, 잊지 말아야 할 가련한 존재들이 또 있지요. 바로 ‘물질’에서 희망을 찾아 보려는 이들입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물질을 숭배하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팔 하나 들어올리지 못하는 물질들에 우리의 희망을 두는 것이지요. 돈을 숭배하고 자신이 가진 부동산을 숭배하는 가련한 이들,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과 능력을 수시로 무시하는 이들입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돈은 있어야 하지 않나?’라고들 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로 살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것들을 숭배하지 말라고 했지요. 숭배와 필…

칭찬과 시련

사람들이 칭찬해 줄 때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하느님께 나아갈 것 같던 이들이, 아주 작은 성가심에도 견디지 못하고 하던 일을 내려놓는 것을 많이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명예를 즐기는 이들이지 하느님의 뜻을 향해서 헌신하는 이들이라 하기 힘듭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시련 속에서 사랑이 성장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진리를 담은 표현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표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기왕이면 시련 없이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일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8-29)

분명한 질문과 분명한 대답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읽는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는 아주 단순 명료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들끼리 서로 묻습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가 누구야?’

그분께서 보내신 이는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라고 가장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보낸 당신의 외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뿐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느님이 보낸 이들이 생각 외로 많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그 근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아무리 애인에게 잘 해주는 남자라도 이미 아내가 있는 사람이면 그 애인을 위한 사랑의 행위의 근본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한 탐욕이 숨어 있을 뿐입니다. 애인에게 대놓고 ‘사랑한다’라고 속삭이고 있겠지만 아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거짓을 기반으로 한 거짓된 사랑의 관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행위이지요. 입으로 아무리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아무리 다정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멀어진 행위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과 밀접한 행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차려주시는 밥에는 어머니의 책임감과 사랑이 들어 있지요. 어머니가 아무리 퉁명스럽고 말재간이 없으며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서투르다고 해도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아침밥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어머니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한 여인의 노력이 들어있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하느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정반대로 돌아갑니다.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의 따스한 말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무뚝뚝한 어머니가 정성스레 차려놓은 밥상을…

빵의 기적 그 이후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6-27)

사람들은 기적을 은근히 기다립니다. 헌데 그들이 바라는 기적이라는 것은 그 내면의 진정한 가치를 지닌 기적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기적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말하는 기적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상, 하늘에 나타나는 구름, 벽에 나타난 예수님의 형상, 불치병의 치유 등등이지요. 그들은 그러한 신기한 기현상을 보고 나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호들갑을 떨곤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수천배로 늘어난 빵으로 자신들의 배가 너끈히 채워지는 경험을 했지요. 이는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그 안에 숨어있는 참된 의미에 대해서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왜 빵을 많게 하신 것인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생각할 수가 없었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한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당장 사람들은 그 치유에 집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치유의 근본 목적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과연 어떤 치유가 일어났으며 얼마나 불치병이었는지를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의 호기심이니까요. 하지만 하느님이 뜻은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가 치유를 받은 이유는 그가 받은 사랑의 선물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은 전혀 생각지 않고 오직 치유의 기적의 ‘방법론’을 연구하기 시작하지요.

루르드의 성수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봅시다. 마치 루르드의 물이 만병 통치약이라도 되는 듯이 들고 와서 마시곤 합니다. 하지만 그 성수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지는 않지요. 루르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성모님이 무엇을 원하셨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물만 떠와서 아픈 누군가가 마시면 어떻…

영적으로 씻기

사실이 그러하니 세상은 불의와 악으로 가득합니다. 영적으로 우리를 얼마든지 더럽힐 수 있는 요소들이 많지요. 아무리 맑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도 세상 안에 뛰어들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우리의 영혼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수많은 부정적 요소들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는 마치 놀이터 모래밭에서 놀고 들어온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집에서 나갈 때에는 깨끗하게 세탁한 옷에 손발을 깨끗이 씻고 나가지만 모래밭에서 놀면 어쩔 수 없이 더러운 것들을 묻히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헌데 영적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 정도야’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씻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더러움은 찌든 때가 되고 나아가서 곰팡이가 생기고 끝내는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는 셈이지요. 아주 작은 ‘증오’라도 우리 안에 파고들면 그 증오에 분노를 더하고 가중시켜서 언젠가는 내 안에 커다란 악의 흐름을 조성해 놓기에 충분한 요소가 됩니다. 헌데 우리는 ‘이 정도는 괜찮다’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을 뿐이지요.

영적으로 자신을 씻는 것은 ‘반성’하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그 일의 내적인 가치들을 올바르게 살펴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근원을 찾고 그러한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나의 영적 시야를 더욱 맑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대화를 하고 났는데 마음이 조금 어둑해진 느낌을 받으면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대화 주제가 온통 세상적인 주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맛있는 음식 이야기, 화장법 이야기, 좋은 여행지 이야기, 다른 친구 이야기...’ 헌데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공허’해진다는 것을 깨달으면 다행인 것입니다. 특히나 그러한 대화 가운데에서 다른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이야기보다는 부정적이고 험담하는 이야…

막을 수 있었던 일들

오늘 저녁 청년 미사때에는 강론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조금 슬픕니다. 왜냐면 여기 모인 수많은 청년들이 머지 않아 같은 오류를 반복할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거든요. 저마다 지금의 어른들이 이미 겪은 문제를 다시 겪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충분히 보았음에도 여러분들 중에 누구는 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 아내와 아이들을 슬프게 할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나 어머니 중의 한 쪽이 다른 짝을 찾아 떠나서 고통받는 것을 체험했음에도 여러분들은 훗날 자신의 배우자를 두고 또 다른 사랑을 탐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일들이 지금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충분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헌데 안타까운 것은 제가 그런 일들에 대한 경고를 수도없이 했다는 데에 있지요.

알면서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을 두고 ‘바보’라고 합니다. 자신의 머리를 망치로 때리면 아픈데도 또 시간이 잠시 흘러 그걸 잊고서는 망치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사람을 두고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앞에 있으면 보고 웃을 줄 알면서도 실제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자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이미 청년들 중에서는 자신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즐기기 시작한 아이들이 있었고, 이미 자신이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아이와 밀담을 나누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훗날에는 불행을 조장할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었지요. 결과가 뻔히 보이는 일에 저마다 마음을 다해 헌신하고 있으니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슬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미소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언제나 마찬가지였지요.

“여러분,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그 길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길이라면 가는 수 밖에요.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한 말을 잊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는 단순히 ‘지금’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제 말을 간직한 여러분들은 그런 슬픈 일들이 …

잘못하는 아이를 타이르는 방법

1. 힘으로 누르기(채찍)
뭔가를 잘못하려는 아이를 힘으로 누르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권력의 힘,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압박으로 그가 지금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 방법은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에 아이는 하던 잘못을 순식간에 그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점은 이 아이의 내면은 이러한 외적 변화에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아이는 여전히 자신이 하던 행위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걸 억지로 누르니 그 욕구는 아이의 내면에서 억눌린 형태로 잠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순간에 전혀 다른 형태로 튀어나오게 되지요.

2. 아이가 좋아하는 것으로 구슬리기(당근)
이 두번째 방법은 아이의 호기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하려는 짓에서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지요. 그러나 무엇으로 그 아이를 이끄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이에게 장난감이나 세상의 또다른 욕구를 향해서 마음을 돌리게 하면 아이는 지금의 잘못하는 일은 그만둘지 몰라도 내면에는 세상의 탐욕이 깃들게 됩니다. 그래서 이 방법 또한 최종적으로는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3. 아이를 사랑하기
이 마지막 방법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 아이가 ‘선한 마음’을 지니도록 공을 들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다가서는 사람 본인도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 사랑의 원천은 자기 자신이 아닌 ‘영원’에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끊임없는 사랑을 부어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느 정도 사랑하다가 본인의 변덕으로 지쳐 버리면 더 큰 악효과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꾸준하고 마지막까지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에서 말하는 ‘영리함’이 아니라 온갖…

참된 봉사의 마음

- 신부님, 불만사항이 있어요.

어제 찾아온 견진반 교리교사의 말입니다.

- 첫영성체 교사들이 본당 주방을 치워놓질 않아요. 온통 더럽게 해 놓고서는 또 나서서 거짓말을 해요. 자신들은 깨끗이 치워놓았는데 우리가 어질러 놓았다고 하는 거예요.
- 그래요? 이 이야기를 첫영성체 교리교사 대표와는 해 보셨는지요?
- 아니요.
- 그럼 먼저 조용히 가서 이 일을 개선하도록 조언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정중하게 권했는데도 전혀 변함없이 같은 오류를 반복한다면 그때는 내가 분명하게 나서도록 하지요.
- …
- 먼저는 형제적인 사랑으로 대화를 통해서 서로 해결하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래도 안되면 제가 그때는 본당신부의 권위로써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이면, 지금 본당에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본당을 정돈하는 자매님이 있어요. 자신은 본당을 더럽힌 적이 없지만 스스로 와서 본당 청소를 도맡아 하고 계시지요. 만일 우리가 우리가 더럽힌 것만 치우려는 마음이면 아마 나아질 것은 전혀 없을 거예요. 누군가는 다른 이의 부족함을 채워줘야 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먼저 나서서 주방을 깨끗이 치우고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가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 주었으면 한다고 말한다면 더 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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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쉽게 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쉽게만 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누군가를 미워하고 손해 본 것을 되갚으려는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것이지만 내가 나서서 돕고 치우려는 마음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해를 하는 아이들

최근 우리동네에 ‘자해’를 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부모를 위협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위는 사악한 행위입니다. 그 안에는 몇가지 악한 것들이 함께 들어 있지요.

첫째로 자기 자신에 대한 상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몸을 가꾸고 보살피라고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맡겨주신 우리의 몸을 소중히 돌보아야 합니다. 헌데 자해를 하는 행위는 그러한 하느님의 몫을 엉망으로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부모에 대한 불효입니다. 자신의 몸을 볼모로 부모를 위협하는 행위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정반대로 어기는 행위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부모를 위협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는 분이십니다. 그 가르침은 부모가 섬길만할 때에 섬기라는 말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라도 부모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셋째로 지독히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는 그러한 행위들은 순전히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완전한 자기 중심주의인 셈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이용하고, 부모를 이용하고 결국 그 모든 것으로 ‘제 뜻’을 이루려는 이기적이 사고방식이지요.

물론 자녀들이 그런 사악한 방법을 쓰기에 이르기까지 집에서 당해온 처사를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분명 부모들에게도 문제는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녀들에게 그 행위의 사악함에 대해서 분명히 알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에 대한 착각

많은 신앙인들이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미사는 의무다'라는 것입니다. 흔히 예비자 교리 때에 신앙인들이 어떻게든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마음으로 천주교 신자의 6대 의무를 가르치면서 꼭 빠지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6대 의무/ 주일과 의무축일미사 참례, 매주 금요일 금육과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 단식, 1년에 한 번의 고해성사, 1년에 한 번의 영성체, 교무금 납부, 혼인성사에 관한 혼인법 준수)

사실 이는 교회의 기본 테두리를 둘러준 셈입니다. ‘최소한 이것은 하라’는 것이지요. 헌데 신자들은 ‘이것만 하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벗어나지 않으면 그 어떤 다른 어둠의 행위를 내면으로 해도 크게 죄스럽지 않다고 여기지요.

미사는 의무가 아닙니다. 미사는 ‘찬미와 감사의 행위’여야 하고, 그러한 행위에 진실하게 참여하는 이상 기쁨이 가득한 행위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미사는 울며 겨자먹기로 가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가득한 우리의 ‘권리’입니다.

한국 신자들의 이 ‘의무규정준수’는 제법 역사가 오래된 것이고 습관으로 굳어버린 것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교리 안에서 ‘신자 유지’를 목적으로 의무사항에 대해서 열을 토해서 가르치고 그것을 어기면 중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요.

저는 성체를 절대로 씹지 말라는 교육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것은 음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음식은 마땅히 씹어서 섭취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일부러 예수님 당해보라고 꼭꼭 억지로 씹지 않는 것이라면 성체는 고형 음식물이고 당연히 씹어서 섭취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걸 억지로 녹이라고 하니 별 희한한 에피소드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입천장에 들러붙어서 혼이 났다느니 하는 식이지요.

미사는 의무가 아닙니다. 미사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자리이지요. 매일 매일 미사가 있는데도 더 많이 나가지 못하는 걸 죄송하게 여겨야지 한 주일에 한 번 나가는 걸 억지로 참석하고는 의무 규정을 완료했다고 양심의 불을 끄는…

두 가지 가정

가정 #1
돈이 엄청 많은 가정입니다. 집안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내와 어린 아이들은 외로움에 시달립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빠에게 다가가서 함께 어울리기를 바랄 적마다 아빠는 아내에게는 비싼 장신구를 아이들에게는 비싸고 멋진 장난감을 사다 줍니다. 그렇게 마음 속에는 탐욕과 허영심이 늘어만 갑니다. 아버지의 목표라는 것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처음에는 집을 사는 게 목표였다가 나중에는 빌딩을 사는게 목표가 되어갑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이상 추구는 그칠 줄을 모르고 그러는 동안 가족들의 관계는 더욱 서먹해지고 식어가기만 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가정이지만 실제로 이 가정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가정 #2
소박한 가정입니다. 아버지의 직장은 별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족들을 사랑합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늘 아내에게 안부를 묻고, 아이들의 학교 생활에 대해서 묻습니다. 아이들은 값비싼 장난감은 없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아버지가 자신들과 함께 있을 것을 알고 가장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 가정 안에는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이 성장을 합니다. 아버지에게 일이라는 것은 가족을 돌보기 위한 수단이지 자신의 삶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래서 성실히 일은 하지만 보다 소중한 가치를 잃지 않지요. 이 가정은 튼튼한 가정입니다.

둘 중에 무엇이 나은 모습인지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가정들 안에서 두번째 가정의 일치가 드러나는 경우는 참으로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가로늦게 더욱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회복하려는 순간, 이미 아내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은 각자 서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이 무너지기 전에 예방할 수 있었습니다. 헌데 무너지고 나서 회복하려고 하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사전에 …

신비

- 신부님 ‘신비’(misterio)라는 것은 뭐예요?

어제 교리교사 모임 중에 한 청년 교사가 질문한 내용입니다.

- 음, 어떻게 설명해줄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알 수 없다는 것인데, 단순히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지. 왜냐하면 우리의 두뇌가 잡아낼 수 있는 것들은 한계가 있으니까 말야.

사실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아’ 헌데,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야.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입으로 후후 불면 손으로 감지되잖아. 내가 말하는 ‘보이지 않음’은 감각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벗어난다는 말이야.

가만히 따지고보면 우리의 행복, 사랑, 관심과 같은 것도 ‘관측’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야. 다만 과학자들은 교만하게도 모든 것은 관측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거지.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감각할 수 없는,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고 더욱 소중한 것들이 많아. 그러한 모든 것과 연관된 영역을 신비적 영역이라고 하고, 특히 ‘하느님의 크신 뜻’을 신비롭다고 표현하는 거지.

미사 경본 안에 ‘신앙의 신비여’라는 부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 신앙은 그 자체로 신비야. 신앙은 아무리 과학의 눈으로 들여다봐도 찾아낼 수 없는거지. 기껏해야 정신과에서 그 사람의 ‘성격적 특징’을 잡아낼 수는 있겠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손을 뻗는 것과 같아.

마치 겉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작은 문 하나밖에 없는 거대한 방에 내가 그 문을 통해서 ‘신앙’이라는 이름의 손을 집어 넣는 것과 같지. 그러면 그 거대한 방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나의 손을 잡아 당기시는 거야.

우리는 신앙으로 많은 것들을 알게 되.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지. 단순히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되지 않는다고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지. 그러한 모든 것들이 ‘신비’라고 할 수 있어. 이해가 되니?

- 조금요.

의로움과 죄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선한 일을 신선한 빵이라고 생각하고 악한 일을 썩은 빵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신선한 빵이 오른쪽에 쌓이고, 악한 일을 할 때마다 썩은 빵이 왼쪽에 쌓입니다. 우리는 계산을 이런 식으로 합니다. 그래서 신선한 빵이 10개이고, 썩은 빵이 8개면 우리는 10-8=2 라는 계산으로 2만큼의 선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지극히 ‘계산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선한 일로 악한 일을 경감한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충분히 선한 일을 해 두면 악한일을 조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계산법은 완전히 틀려 먹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로움’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마음이 없는데 의로움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다고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즉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일미사에 나간다고 그 주일미사가 우리의 의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모든 오물, 썩은 빵들이 일순간에 사라집니다. 그 순간, 나에겐 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만 죄의 결과만이 주변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다음의 비유가 더 적절합니다. 나아가는 상처와 썩어가는 상처입니다. 나아가는 상처는 아무리 상처가 심해도 우리가 잘 보살피면 꾸준히 자가 치유를 계속해서 상처가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썩어가는 상처는 아무리 상처가 미미해도 꾸준히 썩어가면 결국 온 몸을 죽여 버릴 것입니다.

보다 실제적인 예를 들지요. 누군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이전의 과오로 돌아가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다집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살 것입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반대로 누군가는 아주 작은 악습을 …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할아버지 사는 곳 지저분하지 않냐구요? 네, 지저분합니다.
그럼 할아버지에게서 냄새가 나지 않느냐구요? 네, 납니다.
헌데 왜 그렇게 가서 함께 머무르느냐구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냄새나고 더러운 것은 싫습니다. 그래서 늘 땀을 내고 나면 몸을 씻고 옷이 더러워지만 세탁을 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할아버지를 찾아가고 냄새나는 상처를 돌보는 이유는 보다 중요한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 보다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나의 육신의 안락과 선호는 포기하는 셈입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육신의 안락에 관심이 없는 외계인들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그들도 자신의 몸을 아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육신의 안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참아 견디는 것이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따라서 우리는 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은 각자가 대답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선행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지기에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선행으로 추후에 자신의 가게에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정치인은 자신에게 주어질 투표를 기대해서, 그래서 당선만 되고 나면 다 때려치우고 모두를 지배하기 위해서 지금은 참고 선행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내면에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학생은 참고 공부를 하는 것이고, 직장인은 회사가 치사하고 더러워도 참고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그를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다른 세상의 어느 가치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 그를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많은 것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그것의 실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을 믿으며, 그분의 계획을 믿지요. 그렇기에 그는 지상의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을 위해서 하루를 헌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믿음이 여러분…

텔레비전 미사?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1요한 2.4)

- 신부님, 제가 아는 어느 분은 주일에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켜서 미사를 ‘관람’해요. 그리고는 자기는 미사에 참례했다고 해요.

- 그럼 차분하게 그분에게 말해줘. ‘네, 당신 눈은 미사에 참여하셨으니 영원한 생명에 이르겠네요. 하지만 당신의 몸은 게으름으로 남아 있었으니 그에 속한 곳에 머무르겠지요.’라고 말이야. 하하하.

농담이었지만 농담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 칭하면서 주일의 소중한 날을 자신이 원하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은 ‘미사에 어떻게든 나가라. 나가지 않으면 너희는 대죄인이다.’라는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제가 부족해서 매주 미사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볼리비아 시골의 신앙인들은 모두 죄인이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럴리가 없지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은 일주일 중의 하루를 온전히 하느님에게 내어드리는 생활을 하고 거룩한 휴식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헌데 자신에게 특별한 질병이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데도 주님의 거룩한 만찬에 참여하지 않고 게으름에 빠져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만 틀어서는 주일 미사를 봤다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상급이 뒤따르겠지요.

미사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한 그 어떤 애정도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주일 미사에 나오고 교사 회합을 하고 성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 그는 주일의 의무를 올바로 지키지 못한 셈이 됩니다.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헌데 여전히 한국의 신앙인들은 ‘주일의 법적 의무규정’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주일에 성당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면 의무는 끝난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

마땅히 했어야 하는 작은 일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언제나 ‘결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결함들이 모여서 큰 움직임을 형성하기 시작하면 사회적인 악이 형성됩니다. 작은 불의에 대해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 그 결과가 어느새 나의 대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을 체험하게 되지요.

‘나는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로는 불충분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지요. 당신을 심각한 범죄자라고 고발할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엄청난 탈세를 한 적도 없지요. 우리는 소시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무언가를 거르고 있다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가난한 이웃을 돌보려 하기보다는 당장 내 생활의 윤택함을 개선하기 위해서만 노력해 왔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못한 이를 돌보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못한 이’가 될 때, 아니면 나의 가족 구성원 중의 하나가 ‘못한 이’가 될 때에 그 누구도 우리나 그들을 돌보지 않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니까요.

사실 이 일은 아주 작은 공동체의 범위인 ‘가족’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불의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데 ‘내가 한 짓이 아니니 나는 신경쓰지 않겠다’라고 하고 있으면 그 불의는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셈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불의가 견디다 못해 불거져 터져 나오면 그제서야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인가?’하고 외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는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 온 셈이지요.

남편을 소중히 돌보지 않는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내를 소홀히 하는 남편은 어느 순간 신경질이 도질 아내의 상태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헌데 그런 자신의 미미한 행동을 알아 차리거나 반성하기는 커녕, 사건이 터지면 서로 상대를 비난하고 헐뜯는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피해야만 했던 세상의 권력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이 구절은 예수님의 빵의 기적 이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은총을 ‘현실적’으로 체험하게 도와 주었습니다. 그들의 배를 채우면서 하늘나라의 부족함 없이 넘치는 은총에 대해서 보여주려고 하셨지요. 헌데 사람들은 ‘배를 채운 그’ 만을 바라본 셈입니다.

사람들은 가르침을 분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장 자신의 주린 배를 현실적으로 채워주는 이를 더욱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요. 예수님이 그토록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금세 잊어버린 셈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나라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내밀한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가령 상상을 해 봅시다.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그분은 당신의 능력으로 시대를 평정하게 될 것입니다. 빵을 먹이고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으로 당신은 현세의 모든 권력을 단숨에 휘어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런 능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 자체는 ‘하느님 안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헌데 하느님이 한 인간이 세상을 휘어잡아 권력을 행사하기를 바라셨다면 진작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세상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시킨다 할지라도 인간의 내면의 ‘선과 악’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에 있습니다.

여전히 인간들은 악을 저지를 것이고, 다만 ‘위대한 통치자’가 있는 동안에는 눈치를 보느라 크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각 가정마다 자신의 현세적 통치권을 행사할 수는 없을 것이고 결국 불의는 여전히 인간 세상에 판을 치게 됩니다.

참된 다스림은 외적인 억압과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지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사람의 활동은 언제나 끝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적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저의 변덕에서 나온 활동이라면 머지 않아 끝날 것이니 혹시나 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시는 분들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진리의 일이라면 상황이 다릅니다. 이 일이 단순히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에 관계된 일이라면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단편 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진솔한 일, 진실된 일을 하는 이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압니다. 비록 박해를 받겠지만 그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잘 이해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변덕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지요. 그래서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분명 진실한 것인데 본인의 변덕으로 그들에게 대적하는 이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하등의 결함이 없음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꼴보기 싫어하는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말과 행동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수정해 주어야 합니다. 오류에 빠진 이에게 다가가 충언해 주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자신들은 압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나의 깊은 사랑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말이지요. 그리고 특히나 현대에 사람들은 지극히 피상적인 이들이 되어 이런 저런 주변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가 일쑤입니다.

우리의 활동이 언제나 하느님의 빛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옳아 보이는 활동이라도 나의 변덕에서 시작된 그릇된 활동일 수 있으니까요.

하느님의 진노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 3, 36)

하느님의 사랑을 부르짖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분의 진노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삼풍백화점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의 설계도면을 넘어서서 과중한 무게가 실리는 것을 쌓고 또 쌓다가 결국에는 무너져 내린 사건이지요. 하느님의 진노는 이와 비슷하다고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릇된 행위 안에 의지적으로 머무를 때에 하느님은 당신의 진노를 그 사람 위에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장 집행하지는 않으시고 시간을 두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 그에게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통상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무시하고 다시 자기 죄에 새로운 죄를 더 얹는 것이 보통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가 그 즉시 뉘우쳐서 마음을 돌이키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왕지사 거짓말을 시작한 것, 다시 새로운 거짓말로 이전의 거짓말을 보호하려 들고, 또 그 위에 새로운 거짓말을 해서 알리바이를 조성하지요. 그러나 그러다가 한계점에 이르러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거짓말에 자신이 무너지는 경우가 발생하지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오류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뉘우치기는 커녕 다음 번에는 더 ‘완벽한’ 거짓말을 준비하려고 하지요. 죄를 짓는 모든 이들의 삶은 비슷비슷합니다. 그들은 죄의 달콤함을 놓치기 싫어서 다음번에는 더욱 더 완전한 형태의 죄를 준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매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의 악행을 ‘정의롭게’ 심판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술을 과하게 들이키고, 속이 뒤집어져서 토해내고는 다시 시간이 지나 옛 기억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