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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자들

우리는 주변에서 큰 재앙을 바라보면서 알지 못할 존재의 분노를 감지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하느님이 노했다’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통상적인 정서이지요. 물론 이는 단순히 한국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입니다.

그럼 이제 하느님 편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대재앙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질러놓은 죄악의 결정판으로 이루어지는 재앙에 관한 것입니다. 삼풍 백화점이나 세월호 사건 같은 것은 인간의 죄악이 누적되어 결과적으로 한 지점에서 폭발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 누군가는 물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왜 그들을 구원하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하느님은 무능력한 것이 아니냐고 따지고 묻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의 무능력의 결과일까요? 아니면 일찍부터 예견되어 왔고 사전에 경고되어 온 일을 실천하지 못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정당한 결과일까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인간의 죄악의 결과인 것은 인정하지만 왜 악인들이 심판받지 않고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이 그 피해를 보아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참으로 미묘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항목별로 정돈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만드셨고, 선으로 모든 것을 가꾸어 나가셨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이 악하게 나아갈 때조차도 하느님은 자비를 통해서 인간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조리 엉망 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마저 왜 당신의 자비로 모두 완벽하게 없던 일로 돌리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그런 질문을 하는 이 스스로 생각해 보셔야 할 문제입니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말입니다. 이는 마치 자기 스스로 불량식품을 마구 먹는 아이에게 부모님이 사랑과 애정으로 그러면 안된다고 온유하게 충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구 먹어 놓고는 나중에 배가 아프니 그 아픈 배를 어찌해 달라고 떼를 쓰는 못된 아이와 같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의인과 악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의인과 악인에 대해서 어쩌면 강한 흑백논리를 적용시키곤 합니다. 뭔가 된통 당한 사람을 무조건 의인의 자리에 올려두고, 그 반대로 악을 행한 이들을 무조건 악인의 자리에 두지요.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뚜렷하게 갈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악을 행한 적이 있고, 선을 행한 적이 있지요. 그러나 그러한 하나의 행위가 우리를 분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가운데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오류가 있고 잘못이 있지요. 수많은 재난으로 죽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 가운데 우리가 그들의 삶을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몇가지 에피소드를 들어서 그들이 착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 뿐이지요. 예를 들어서 예비 성소자였고 신학교를 들어가서 신부가 되었다가도 돈을 탐내는 마음으로 변질되는 사람이 있는데, 단순히 ‘예비 신학생’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그의 삶이 온전히 의로웠다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만 해도 예비 신학생의 신분이었으면서도 때로는 세상이 것을 극도로 탐내곤 했었는데 모든 예비 신학생은 근본이 천사라는 것은 지나친 과장입니다.

그럼 마지막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악인들이 저지를 잘못을 아무런 죄도 없는 이들이 덮어써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는 ‘영원’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정말 아무런 죄도 없는 이가 타인의 죄로 인해서 희생 되었다면 그 영혼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은 의심할 바가 없지요. 그리고 그 악인, 온갖 악을 저지르고서도 지상에서 태평을 누리는 것 같아 보이는 악인의 영혼은 훗날 어찌 되리라고 보십니까? 저는 하느님의 정의를 믿습니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분이시지만 때가 되면 당신의 정의를 반드시 집행하실 분이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그럼 인간이 만들어 낸 재앙이 아닌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자연은 예로부터 자신의 움직임 속에서 환경을 형성해 왔습니다. 홍수가 나고 대륙들 간에 서로 부딪혀서 지진이 일어나고 하는 것은 모두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인간이 노화로 인해서 죽는데 그것을 불평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구 전체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물론 인구밀집 지역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그 희생자의 어마어마한 숫자로 인해서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에서 ‘징벌’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자연스러운 진행과정 속에 반대의 방향은 존재합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 존재하지요. 엄청난 자연재해 속에서 특별한 은총을 받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함께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특별한 지시를 받고 살아나는 경우이지요. 우리는 이를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그 자체의 현상보다는 그 사람이 기적을 체험할 만한 어떤 동기를 가졌는가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무에게나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지는 않으니까요.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가 행해야 하는 사명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설명들이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충분한 해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핵심은,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단순히 현세의 생과 사를 바라보시는 게 아니라 보다 영원한 차원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직시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악인은 그에 합당한 몫을 받을 것이며, 모든 선인 역시도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러는 동안 지상에 머무르는 우리들은 슬픔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제 나름의 의미와 기쁨을 찾으려고 바둥대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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