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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바로 그 말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요한 12,47-48)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당신이 심판하지 않고 당신의 ‘말’이 심판을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말이라는 것은 단순한 ‘소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소리는 벽에 부딪혀도 나는게 소리이고 박수를 쳐도 나는 게 소리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그 안에 의도와 뜻이 담긴 것이지요.

말에도 종류가 여러가지가 있으니 단순한 정보를 담은 말이 있는가 하면 강한 의지를 담은 말이 있습니다. 물론 아무런 의지가 담기지 않은 말은 없습니다. 뉴스 앵커가 하는 말은 정보만이 아니라 그 기사를 쓴 자의 의지, 즉 자신의 기사를 믿어 달라는 의지가 담겨 있는 셈이지요.

그럼 결국 모든 말들에는 최초 발설자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셈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에게 유용하다고 생각되고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말들을 들으려 하지요. 수많은 말들 가운데 우리 자신이 선별하는 말들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단순히 ‘듣는다’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내면적으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한 가운데 ‘하느님’에게서 발설된 말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말들이지요. 그 말들 속에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 즉 구원의지가 존재합니다. 우리를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께로 이끌려는 강한 의지가 존재하지요.

우리는 그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셈이지요. 그 말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드러나게 되지요. 말씀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들이 갈리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말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말을 듣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상품의 정보, 새로 나온 음식과 맛있는 음식, 자신의 육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건강에 관한 정보와 같은 것은 절대로 흘려 듣지 않습니다. 반드시 챙겨 듣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들은 무엇이든 말을 듣고 현재를 살아가는 중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자녀인 척을 하는 세상의 자녀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지요. 그리고 심판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셈입니다.

“내 말을 물리치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생겨나고 그들은 이미 심판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의 말을 거부한 것 자체로 이미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막연하게 ‘나는 아직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니, 오히려 가끔씩은 말씀에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이것 쯤이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셨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지요. 인내하고 겸손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이 훗날 우리 스스로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알면서도 전혀 행하지 않았던 그 수많은 경우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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