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이 그러하니 세상은 불의와 악으로 가득합니다. 영적으로 우리를 얼마든지 더럽힐 수 있는 요소들이 많지요. 아무리 맑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도 세상 안에 뛰어들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우리의 영혼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수많은 부정적 요소들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는 마치 놀이터 모래밭에서 놀고 들어온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집에서 나갈 때에는 깨끗하게 세탁한 옷에 손발을 깨끗이 씻고 나가지만 모래밭에서 놀면 어쩔 수 없이 더러운 것들을 묻히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헌데 영적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 정도야’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씻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더러움은 찌든 때가 되고 나아가서 곰팡이가 생기고 끝내는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는 셈이지요. 아주 작은 ‘증오’라도 우리 안에 파고들면 그 증오에 분노를 더하고 가중시켜서 언젠가는 내 안에 커다란 악의 흐름을 조성해 놓기에 충분한 요소가 됩니다. 헌데 우리는 ‘이 정도는 괜찮다’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을 뿐이지요.
영적으로 자신을 씻는 것은 ‘반성’하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그 일의 내적인 가치들을 올바르게 살펴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근원을 찾고 그러한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나의 영적 시야를 더욱 맑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대화를 하고 났는데 마음이 조금 어둑해진 느낌을 받으면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대화 주제가 온통 세상적인 주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맛있는 음식 이야기, 화장법 이야기, 좋은 여행지 이야기, 다른 친구 이야기...’ 헌데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공허’해진다는 것을 깨달으면 다행인 것입니다. 특히나 그러한 대화 가운데에서 다른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이야기보다는 부정적이고 험담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부터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분별력이 없으면 여전히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그런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공허한 존재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으면서 참으로 보람찬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공허’는 우리의 마음 속을 파고드는 것이지요.
술자리를 즐기는 남자들의 심리도 비슷합니다. 술이라는 것 자체는 이미 그 특성상 우리를 약간 들뜨게 만들어 줍니다. 나아가 흥이 돋구어지면 언젠가는 조금 더 과하게 마시는 경우가 발생하지요. 그렇게 건강에 미미하게 해를 끼치고 그리고 그 영향은 다음날까지 ‘피로함’으로 미치게 됩니다. 헌데 그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반성하지 못하고 ‘이 정도야 뭐’라는 마음으로 살기 시작하면 어느새 그것은 ‘습관’이 되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정반대의 모습도 있습니다. 세상은 오로지 악과 불의만 가득하진 않습니다. 여전히 ‘희망’이 있고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분별해 낼 필터가 존재하지 않아서 많은 경우에 그들은 세상 안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그들이 언제나 제 역할을 하게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훗날 영원의 나라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들이 될 것입니다.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다니 12,2-3)
이는 마치 놀이터 모래밭에서 놀고 들어온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집에서 나갈 때에는 깨끗하게 세탁한 옷에 손발을 깨끗이 씻고 나가지만 모래밭에서 놀면 어쩔 수 없이 더러운 것들을 묻히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헌데 영적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 정도야’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씻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더러움은 찌든 때가 되고 나아가서 곰팡이가 생기고 끝내는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는 셈이지요. 아주 작은 ‘증오’라도 우리 안에 파고들면 그 증오에 분노를 더하고 가중시켜서 언젠가는 내 안에 커다란 악의 흐름을 조성해 놓기에 충분한 요소가 됩니다. 헌데 우리는 ‘이 정도는 괜찮다’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을 뿐이지요.
영적으로 자신을 씻는 것은 ‘반성’하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그 일의 내적인 가치들을 올바르게 살펴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근원을 찾고 그러한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나의 영적 시야를 더욱 맑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대화를 하고 났는데 마음이 조금 어둑해진 느낌을 받으면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대화 주제가 온통 세상적인 주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맛있는 음식 이야기, 화장법 이야기, 좋은 여행지 이야기, 다른 친구 이야기...’ 헌데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공허’해진다는 것을 깨달으면 다행인 것입니다. 특히나 그러한 대화 가운데에서 다른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이야기보다는 부정적이고 험담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부터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분별력이 없으면 여전히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그런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공허한 존재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으면서 참으로 보람찬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공허’는 우리의 마음 속을 파고드는 것이지요.
술자리를 즐기는 남자들의 심리도 비슷합니다. 술이라는 것 자체는 이미 그 특성상 우리를 약간 들뜨게 만들어 줍니다. 나아가 흥이 돋구어지면 언젠가는 조금 더 과하게 마시는 경우가 발생하지요. 그렇게 건강에 미미하게 해를 끼치고 그리고 그 영향은 다음날까지 ‘피로함’으로 미치게 됩니다. 헌데 그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반성하지 못하고 ‘이 정도야 뭐’라는 마음으로 살기 시작하면 어느새 그것은 ‘습관’이 되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정반대의 모습도 있습니다. 세상은 오로지 악과 불의만 가득하진 않습니다. 여전히 ‘희망’이 있고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분별해 낼 필터가 존재하지 않아서 많은 경우에 그들은 세상 안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는 그들이 언제나 제 역할을 하게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훗날 영원의 나라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들이 될 것입니다.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다니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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