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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알아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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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올바른 가치를 배우는 것과 잡다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배움'이라는 미명 하에 정말 많은 지식 정보들을 습득해 왔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그 배움의 범위는 넓어져만 갔습니다. 지금은 아주 어린 꼬마 아이들도 나날이 듣고 보는 수많은 영상물 속에서 '지식'이 한껏 넒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치'는 좀처럼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배울수록 나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느낌을 받지만 '가치'는 배우는 데에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하고 또 그것을 배워서 당장 효과를 느낄 수 있는 여지가 그다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지식'에 집중하지만 '가치'에서는 멀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대표적인 가치 교육의 장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 공동체부터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집안에서 '가치'가 사라지게 되면 연쇄적으로 다른 가치들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니나다를까 학교에서도 가치가 사라지고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던 신앙의 영역에서조차도 가치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잃어버렸고 그것은 점점 더 공공연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성당을 다닌다는 사람들도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인간관계의 장으로서 종교적 단체가 존재할 뿐, 신앙적 가치는 갈수록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가치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존재하던 가치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다만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 뿐입니다. 문명의 이기라고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던 많은 것들이 역으로 우리의 내면을 공격해 들어와서 가치를 파괴하는 무기로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세상의 진보는 역으로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내적 가치를 올바로 세우는 데에 헌신해야 합니다

빵을 배불리 먹있기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월요일 복음 중에서) 표징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것은 그 내면에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의미야말로 진정한 진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돈을 버는 것을 멋진 일로 치부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정말 성실한 사람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그 과업을 이루어 낼 수도 있고 정반대로 온갖 편법과 거짓으로 원래는 쌓이면 안되는 이득을 취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외견을 지녔다고, 사제복을 입고 수도복을 입고 있다고 모두 자동으로 거룩하라는 법도 없습니다. 이미 신자들은 앞에서는 웃음을 보이지만 뒤에서 수근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솔한 삶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고 언제나 속으로 되뇌이는 것을 꺼낼 뿐이니까요. 교회 가까이 살기만 한다고 해서 거룩해질 것 같으면 성당 주변의 모든 상점들의 주인들은 거룩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 환경이 열악한 곳일수록 오히려 그들의 신심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성당에 와서 얻을 것도 없고 누릴 것도 없는 곳이라면 그들이 오는 이유는 오히려 진정한 신앙의 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와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도 있고 재산도 벌어들일 수 있고 정치적 세력도 규합할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의 내면에 진정한 신심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성당에 즐겁게 오던 이유를 없애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당만 오면 술판을 벌일 수 있고 고스톱을 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서 오던 사람

신부님은 정말 행복해요?

볼리비아에 가기 전 한 당돌한 청년이 저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정말 행복해요?" 그 질문을 받고는 저는 순간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고 사람들 앞에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저였지만 정작 저 자신이 정말 행복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제 마음 속에는 온갖 종류의 정화되지 않은 욕구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미 선교를 마치고 그 친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그때 한 질문에 대해서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나는 행복해."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기준점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자녀'라는 행복이었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위해서 나날이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삶의 기초에서 나오는 행복이었습니다. 그건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인 남미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행복이었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가난한 음식을 즐기면서도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난했기에 그 행복의 진실성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용서'받습니다. 단순히 '용서'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생명은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용서를 넘어선 구체적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체험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반면 그녀를 돌로 치려던 이들은 여러 면에서 불행합니다. 그들은 돌을 내려놓고 집에 가서도 불행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모두 실패하고 나서 어쩌면 더욱 분노에 차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여인을 심판하고자 했고 나아가 예수님을 모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의 악행을 잠시 멈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행복해지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진실과 거짓 - 영혼의 빛과 어둠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다니 13,59) 예수님은 당신을 세상의 빛으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배우는 사람일수록 숨겨진 진실을 올바로 바라보게 됩니다. 반면 사탄은 언제나 어둠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거부한 그 이유로 인해서 영혼의 빛이 꺼져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영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월등히 뛰어넘을 정도로 영리합니다. 그래서 아둔한 인간이 걸려 넘어지도록 온갖 술수를 계획합니다. 소위 음모를 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험담할 때에 그 자리에는 멍청한 사람들만 모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똑똑하다는 이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들고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술수를 짭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영적인 면에서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어둠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장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고 그 거짓으로 사람의 영혼을 어둡게 물들여 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거짓의 방패막이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짓는 이들은 언제나 거짓을 방패로 삼으려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그 사랑을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은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온갖 거짓을 아내에게 꺼내야 합니다. 거짓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하는 모든 농담도 사실은 허구이고 일종의 거짓입니다. 그러나 농담을 했다고 해서 누군가 다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다루고 있는 사안이 중요할수록 거짓의 위중함도 더해갑니다. 친구에게 농담을 하는 것과 사제에게 중요한 사안을 거짓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더군다나 다른 이의 목숨을 가지고 말하는 이들은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

  연중   제 4 주일 “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 ” 오늘  2 독서는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   우리에게   전합니다 .  “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  사랑은   친절합니다 .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  뽐내지   않으며 ,  교만하지   않습니다 .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  성을   내지   않고 ,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  모든   것을   믿으며 ,  모든   것을   바라고 ,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그러나   이어서   복음에   예수님의   현실적   처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  앞서   말한   모든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시는   것이 분명한   예수님은 ,  정작   현실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모습을   보입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는  ‘ 화가 잔뜩   났다 ’ 고   표현하며   심지어는   살인의   시도까지   합니다 .  그들은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서   그분을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  그러나   정작   그분은   유유자적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뒤에   그들을   떠나   버립니다 . 예수님의   사랑이   부족했던   걸까요 ?  그럴리는   없습니다 .  행여라도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그분이   성부   성자   성령의   한   분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  그분은   가장  

믿는 이들에게 따르는 표징

1. 마귀들을 쫓아냄 예수님은 그 누구도 배척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들 스스로 배척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건 바로 진리의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가령 가난한 이를 돌보라고 하면 자신에게 가진 것이 많은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떠나가는 식입니다. 또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려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시기에 사로잡혀 그분을 죽이려고 드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리의 빛이 세상을 비추면 허황되고 거짓된 것들은 물러나게 됩니다. 2. 새로운 언어 무슨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다는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새롭다는 것은 새로운 휴대폰이나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다는 것은 전에 사용하지 않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언어라는 것은 천상적인 언어, 즉 하느님만이 지니신 고유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거래'를 합니다. 악인들도 서로의 뒤를 봐 주고 돌보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언어는 빛을 찾는 이들에게 빛을 주는 언어입니다. 이러한 언어는 이전까지의 신앙인들이 사용해 오지 않던 언어입니다. 3. 뱀과 독에 해를 입지 않음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바는 '영혼의 해악'입니다. 뱀과 독이라는 것은 사악한 의도를 지닌 사람과 더러운 영적 가치들을 말합니다. 의인은 그러한 것들을 가까이 두더라도 해를 입지 않습니다. 내면에 그러한 요소들에 물들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와 함께 지냈지만 그에게 물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그분의 육신에 '죽음'의 손상을 입혔지만 그분의 거룩한 영은 그분에게 부활이라는 영광을 선물합니다. 4. 병의 치유 병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습니다. 몸의 병도 병이지만 가장 중요하고 뿌리깊은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하느님의 제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마음의 병을 치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