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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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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진보의 도식

선한 사람이 늘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선하니까 그 선한 성정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한 사람은 기본 성정이 선하긴 하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것을 수용하지만 아닌 것에는 과감하게 아니라고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하느님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그의 내적 영역이 확장되고 넓어지면서 사랑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악한 이도 받아들이는 여유를 지니게 됩니다. 그의 악한 성정과 악한 의도를 알면서도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이기 위해서 그 악을 수용하는 것이지요. 헌데 이 모습이 외부 사람들이 보면 정말 멍청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 됩니다.

도식화 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악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사람
악을 저지르지만 뉘우치는 사람
악을 알아보고 저지르지 않지만 구체적인 선을 행하지도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약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약함을 극복하고 악을 분별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더 많은 선의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타인의 악을 분별하고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

물론 여러분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이것이 '공식'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도식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한 사람이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약하다가 내일은 선에 적극적일수 있고 또 다른 날은 유혹에 빠져 악을 저지르고나서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상태'…

무엇을 갈망하는가?

최고급 승용차를 산 사람이 친구들에게 자랑을 시작합니다. 그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그리고 그 부러움 가운데에는 '시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그 자랑하는 친구가 쫄딱 망해 버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악한 마음도 포함된 셈이지요. 그래서 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자랑으로 주변 사람들의 악한 의도를 끌어당기는 셈입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것을 바탕으로 주변에서 다가오는 대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세속적인 요소를 드러내면 세속적인 마음들이 다가옵니다. 반면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을 드러내면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루한 미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에게는 그만한 은총의 수로가 따로 없지요.

남미에서 선교를 하면서 사제의 존재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방치된 공동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번의 미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비록 자기네 말을 어눌하게 하는 사제라도 큰 도움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영적 양식을 누리는 법을 제대로 배우면 우리는 많은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만' 찾아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서 다가갔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예수님을 목말라했지요. 그들의 힘든 삶에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미 잘 사는 이, 이미 누릴 게 많은 사람은 그러한 위로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가진 것을 쓰기에도 바쁘기 때문이지요.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사제의 인격

교회가 세상 안에서 힘을 지니고 있을 때의 향수를 지닌 분들이 많습니다. 동네에서 신부가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고 나름 지식있는 사람이었으며 동네의 유지이기도 한 시절이 있었지요. 아직도 대형본당에서는 비슷한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당연히 신자를 수천이나 거느린 지역 유지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세상도 많이 성장을 해서 더이상 예전처럼 주임 사제가 동네의 식견있는 어르신이자 유지로 간주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에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그래서 현대에 사제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좋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제는 사제직 그 자체로 부여받는 영적인 능력과 더불어서 ‘인격적 성숙’도 마땅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기본도 안 된 인간’으로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직도 신자 어르신들의 향수에 젖은 대우에 길들여져서 세상 안에서 기본도 되지 못한 인격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다가는 욕을 먹기가 일쑤입니다.

사제는 어르신들에게 공손해야 하고 신자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또 인내심을 갖추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고 서서히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기본적인 덕성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로 단순히 오랜 기간을 신학교에서 공부해서 사제직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는 이제는 크게 인정을 얻지 못하게 되는 세상입니다.

사제는 너무나 드높은 사제직에 늘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인격적 소홀함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흔히 말하는 ‘신부도 인간인데’라는 말이 사제직의 드높음에 부족하다는 표현으로 쓰일 수는 있지만 인간이 덜 된 것을 감싸주는 의미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고 지나치게 화려한 취미활동에 헌신하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비흡연자들이 있는 곳에서도 거침없이 담배를 빼어무는 식의 …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21,2)

사람은 저마다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이유는 뚜렷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바람직한 길’ 혹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싫은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고치기보다는 그냥 그것과 함께 머무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차선책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걷는 길은 우리 자신에게는 ‘바른’ 길인 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심지어는 악한 이들도 자신들이 하는 선택 만큼은 자신에게는 바른 선택이 됩니다. 자신이 지닌 내면이 바라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이의 마음을 당신의 선으로 살피십니다. 그리할 때에 당신의 마음에 드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나뉘게 됩니다. 바로 선과 악의 활동 영역이 나뉘는 거지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된 동안에는 우리가 선택하는 활동이 모두 ‘바른 활동’이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부터 각자의 길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는 마치 멈춰 있는 물 안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던 물고기들이 강물에 던져지게 되면서 강물을 거스르는 물고기와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 물고기로 나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바름’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바름은 단순히 우리를 고생스럽게 하거나 성가시게 하는 바름이 아니라 진정한 바름입니다. 그 바름에 익숙해져 갈 때에 비로소 우리의 모든 것이 올바로 회복되어 가는 것입니다.

속에 든 것을 알아보기

차별을 하지 말자는 주장, 혹은 관용을 가지자는 주장이 옆길로 새면 ‘선과 악’에 구분을 두지 말자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진정한 어둠의 세력의 농간이 시작되지요. 사람들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서로가 다르기만 할 뿐 모든 것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악’을 스스럼 없이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워낙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겉으로 알아차리기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이러한 분별에는 굉장한 내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론 아주 어린 아이, 영이 맑은 아이, 혹은 영이 섬세한 어른은 그 즉시 느끼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금방 느끼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고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는 합당한 훈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번은 한 사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하는 일 중에 어느 특정 영역에 집중하면서 그 진의를 가려내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그가 내린 결론은 내가 나 자신의 이익에 집중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독히 편협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전체를 보지 않고, 보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마치 길게 그어진 선 가운데 한 부분을 전자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고는 이 선은 뒤죽박죽이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선은 전체적으로 보면 깔끔하고 잘 그어진 선이지요.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등장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 그 보고 싶은 것은 벌써 우리의 내면이 결정해 놓은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느냐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지만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고 있는지를 보려는 사람은 전혀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됩니다.

세상에서 멋져 보이는 모든 의견이나 활동이 다 ‘선’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의견이나 활동 가운데에는 지독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지금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다음에 훗날 크게 사기를 치려는 마음을 지닐 수도 있는 …

구조가 바뀌길 원하는 이들

단지 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들의 내면에 같은 생각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과 사랑을 키워나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증오와 원한을 키워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성당 안에 같이 머무른다고 다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더 열렬히 따르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을 빛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당이라는 외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야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움직이지 않는 물은 고이게 되고 썩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맑은 물이었다 할지라도 그 물이 고여서 정체되어 버리면 썩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순진하게 받아들였다가도 그 신앙이 더는 움직이지 않은 채 고여서 ‘교만’과 ‘탐욕’에 젖어들기 시작하면 그 신앙은 썩기 시작합니다.

제도가 바뀐다고 사랑이 절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물통을 아무리 높은 곳에 둔다고 절로 물이 움직여지는 게 아닙니다. 물은 흘러야 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각자의 개인의 고유한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런 고유한 활동들이 모이게 되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큰 틀을 뒤바꾼다고 해서 자동으로 움직임이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법을 세우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따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틀을 바꾸면 개인이 뒤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공포와 두려움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의 손길을 받은 이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사랑받는 이만이 사랑할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일은 바로 이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우겠다면서 성경을 들여다보지만 좀처럼 예수님께서 실제로 행하셨던 바를 찾아내고 그것을 뒤따라 살아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큰 틀을 바꾸어 사람들을 지배하려 했던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약하고 미천한 이들에게 사랑을 전해서 그 사랑이 모여들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