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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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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과 낡은 것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제품이 만들어지고 우리의 구매 욕구를 자극합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곰곰이 따져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새로운 것이 더 낫다는 '신조'아래에서 새로나온 물건을 소유하고 보란듯이 드러내고 다니는 것으로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옛 것은 낡고 몹쓸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표주자는 당연히 우리가 지닌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정적인 부모님의 모습, 어르신을 공경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은 낡은 것이 되었고 지금은 무엇이든 반발하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는 것이 멋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낡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환심을 사는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물건들 뒤에서 어둠의 영이 미소짓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새롭게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낡았다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가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날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자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새로운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에 깨어 있어라

다른힘이모든것을다해준다면참쉽고편하겠지만결국우리에게남아있을자유가없기에무의미한일이됩니다. 그모든덕과공은그일을한힘의주체가소유하기때문입니다. 반대로우리각자가모두해내야한다면이건또이것대로힘든일입니다. 우리는부족하고나약하기에도움이필요한존재들이기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절묘함은여기에서드러납니다. 우리는전적으로위로부터오는 '은총'으로만일을추진하지않습니다. 그래서그런종류의주장을하는이들을경계해야합니다. 모든것이우리외부의힘으로만이루어진다는주장을하는이들, 구원으로나아가는데에있어서전적으로위의힘이작용하고인간은아무것도하지않아도괜찮다는주장을조심해야합니다. 반면우리는자력으로구원되지도않습니다. 우리에게는반드시우리보다뛰어나고영원한존재의도움이필요합니다. 그렇지않으면세상의모든어두움을이겨내고스스로구원되기에는우리의능력이너무나도부족하다는것을이해할수있기때문입니다.

우리는은총의강한힘으로구원을받습니다. 그러나그런구원의길에들어선우리들은그은총의힘이끊이지않을수있도록나날이스스로를더완성시켜나아가야합니다. 우리는지상에서모든것을 '완벽'하게할필요는없습니다. 하지만언제나더나은완전을향해서꾸준히걸어가야합니다.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가 '사제직'이지만 하나는 일종의 '일'로, '직무'로 주어지는 사제직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보편적'인 사제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제직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특별히 그 사제직을 자신의 고유한 직무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무 사제직은 '봉사'를 위해서 주어집니다. 자신이 마음껏 쓰고 누리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필요'에 합당하게 봉사하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봉사는 신자들을 기분좋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고, 양떼를 돌보고,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편 사제직을 지닌 이들도 자신의 사제직의 가치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즉 그들은 '성화', 거룩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기도를 거행하고 세상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심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오류는 하느님의 탓도, 그 사제직의 탓도 아닙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주어진 선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사제들은 봉사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데에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불어 넣고 틀어진 관계를 다시 엮어주고 가르치고 충고하고 격려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적으로 맡고 있는 양떼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먹거리를 마련해 주고 세례의 샘으로 또 성령의 샘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그저 있는 신자들과 어울려서 화려한 놀이나 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영위하라고 주어진 직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직분을 나누어 맡은 사람으로서 직무상의 의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생활과 자신이 맡은 양 떼(가정, 공동체)의 생활…

사상의 위기

새하얀 옷이 염료로 인해서 물이 들 듯이 인간의 영혼도 ‘사상’으로 인해서 물이 듭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저런 교육을 받고 그에 합당한 물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색으로 옷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염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옷감을 상하게 만들고 더럽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색을 분별하고 더러운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생각과 사상은 우리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예로부터 ‘이교 사상’에 대적해 와야 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진리를 흐리게 만들고 사람들을 엇나가게 만들기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는 언제나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영원을 희망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을 하게 도와줍니다. 하지만 이교 사상들은 그런 사람들을 절망하게 하고 광신이나 맹신에 빠져들게 만들곤 했습니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말하듯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아 들을 수 없는 진리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문자라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이의 삶과 사랑으로 구체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것을 ‘교도권’이라고 부르고 교회 공동체의 삶과 그렇게 형성되어 온 여러 가지 전승을 합쳐서 ‘성전(聖傳)’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때마다 사상의 공격은 형태를 달리하면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바로 지금 현재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 인터넷이라는 수단으로 온갖 정보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엉뚱한 사상에 물들기가 너무나 쉬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상’으로 전해지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전해지기에 그 진리는 퇴색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라고 백번을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의 구체…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강론(포도밭 일꾼의 비유)

복음에서 등장하는 주인은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면모에서는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면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인이 효율성을 따졌을 것 같으면 종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후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세상적인 계산에 몰두하는 약삭빠른 일꾼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효율성을 바탕으로 투덜거립니다.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마태 20,11-12) 주인은 실리를 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의 의도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선물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 즉 은총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원래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늦게나마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초대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선교 사명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선물을 가능한 더 많이 나누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은 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 20,14-15) 하지만 이 본질적 사명이 어느 순간에서부터 ‘효율성’을 겨루는 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선과 악

선한 이들은 악한 이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고집스럽고 악해질 수 있는 건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물인 악은 도무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악함에 빠져들고 물들어가는 그가 자행하는 악이라는 것은 빛마저 빨아당기는 '블랙홀'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하느님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온전한 선, 완전한 선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선한 이들은 하느님을 알고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색채를 벗어나서 얼마든지 선에 대해서 인지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고 실천하는 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그 정반대의 경우도 가능해집니다. 아무리 종교에 몸담고 있어도 실천하는 행위가 악하다면 그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은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서, 즉 선에 대해서 무지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 '무지함'은 순수한 상태의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인' 무지입니다. 즉 선을 보아도 그 선을 선택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과 욕심에 고립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이기성'이 바로 그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저만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일종의 빛인데 이 이기성의 극단을 달리는 사람은 그 사랑을 빨아 당기기만 할 뿐, 자신에게서 그 어떤 종류의 사랑도 나오지 않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어떤 반응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계산된' 반응을 합니다. 즉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올 때에 타인에게 '투자'하는 식의 선을 실천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선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한 이들은 배려, 선의, 호의, 친절, 사랑, 온유, 겸손과 같은 가치들이 나날이 늘어갑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그것이 좋음을 알고 더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