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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용서하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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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한 신학?

내가 신학생 때에 나는 신학자들이 정말 현명하고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현란한 수식어와 고급진 단어들로 가득한 신학 서적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이런 책을 쓰는 사람들은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정말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자신이 배운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저 어렵디 어려운 단어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은 때로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문의 커튼 뒤로 비겁하게 숨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신학자들이라는 사람이 순수하게 연구하는 분야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범주가 전혀 다르게 놀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윤리를 공부한다고 윤리적이 되는 것이 아니며 영성을 공부한다고 영성적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더 거룩해 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론이라는 것이 적지 않은 경우에 '가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일 이러이러 하다면 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지적 놀이터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때로는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는 것도 알았다. 신앙은 이성과 함께 어울려야 하지만 이성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 신앙 안에는 초월적인 영역이 존재하게 마련이고 그것은 우리의 이성의 범주를 월등히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성은 신학에 충실히 봉사하는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칫 교만해진 이성은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고 산산조각난 신앙의 파편들은 그 원초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해하고 책을 쓰기 위해서 신앙을 지니는 게 아니라 그 신앙을 구체화하고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내면과 외면

병원에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술을 지나치게 먹어 간이 아프다고 합니다. 의사는 약물 처방을 하고 다음 약속을 잡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그 사람이 돌아옵니다. 헌데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 증상에 이 약이면 일주일이면 낫고도 충분한 시간인데 왜 낫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검사를 시작합니다. 엑스레이며 CT 촬영이며 MRI까지 찍게 합니다. 피도 뽑고 초음파도 찍어 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그 어디에도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제서야 의사는 감을 잡습니다. 문제는 그의 몸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영적인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이유는 '선'과 '악'으로 양분됩니다. 선을 추구하면서 세상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에 기대서 세상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면은 흔히 감추어지고 우리는 외견으로 평가 받습니다. 더러운 거래를 마주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세속적으로 힘있으면서 영적으로 타락한 행위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서로간의 담합이나 비밀스런 협약과 거래 속에서 힘없는 이들은 고통 당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의 내면이 얼마나 더러워져 있는지를 알고 그들의 훗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안다면 그들에게 분노하기보다 차라리 연민을 품는 것이 더 나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내적인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컨닝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결과를 바라보는 부모는 그것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자녀로 인해서 '자랑거리'가 하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만 들어간다면 누구를 어떻게 짓밟든 누구에게 청탁을 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타락한 세상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순수합니다. 영혼이 맑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안에서 천덕꾸러기

로마서의 조심해야 할 행동들

흥청대는 술잔치(진탕 먹고 마시기, 포식) orgies, banquetes 악마는 사람을 바로 악으로 이끌어 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도망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처음에는 좋아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이끌어서 최종적으로 그 사람을 타락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하는 연회, 잔치는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잔치들 가운데에는 본질적인 친교를 도외시한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임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로마 시대에는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온갖 쾌락적 요소가 난무하는 연회가 벌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추잡한 연회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1차로 끝나지 않는 잔치를 이어가면서 자신의 죄스런 갈증을 채워 나갑니다.  만취(취함, 폭음) drunkenness, borracheras 술이라는 것은 '흥겨움'을 불러오는 음식이자 기호식품입니다. 하지만 취함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술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에 그 술은 우리의 영혼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의 술 문화는 말 그대로 취하기 위한 목적의 음료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소비합니다. 그래서 더 빨리 취기를 느끼는 것 외에는 달리 술 그 자체가 고유하게 지닌 음식으로서의 가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취함은 언제나 우리를 올바른 사고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또 영적으로도 죄스러운 쾌락을 찾도록 합니다. 그래서 지나친 취기는 언제나 영적인 타락과 이어져 있습니다. 음탕(음행)promiscuity, lujuria 우리의 성적 욕구는 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그리고 자녀의 출산으로 이어질 때에는 하느님의 축복된 도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을 쾌락 그 자체로만 이용하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심각하게 타락시킵니다. 우리가 성의 고유한 역할과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곧잘 성은 쾌락의 도구로만 이용되고 또 그 쾌락은 강렬하기 때문에 수

교회를 세우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마음 속에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무너져 가는 교회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돌들을 모아 작은 경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목소리의 의미는 물질적인 교회가 아니라 영적인 교회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는 내면의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의 눈이 감겨 있을 때는 엉뚱한 일을 두고 그것이 좋은 일인 양 매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무렵만 하더라도 좋은 신학생이 된다는 것은 마치 술을 잔뜩 많이 마시고도 취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잘 버티는 신학생이 좋은 신학생이라는 분위기가 존재했습니다. 오죽하면 소주 한 잔 못 걸치고 고스톱 칠 줄 모르고 개고기 먹을 줄 모르면 신부가 아니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소위 술사목이라는 것이 활개를 치던 때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대기만하면 그 교회는 성장 하는 것이고 본당의 재정 규모가 커지고 흥청망청 원하는 대로 돈을 지출 할 수 있으면 좋은 교회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는 그렇게 성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문턱이 닳도록 교회를 드나 들었고 새로 지어지는 본당의 숫자는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기성세대 신앙 생활을 바라본 자녀들은 교회의 영적 가치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실망 해 버린 그들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교회는 짠맛을 잃게 되었고 아무 짝에 소용없어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에 돈만 생각하는 상인들이 가득하고 하느님의 기도하는 집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교회 한해가 다시 밝았습니다. 저 멀리서 주님의 빛이 새롭게 비추어 옵니다. 이제 우리의 감겨져 있던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 바라시는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살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친교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죽마고우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조금 가까워지나 싶으면 휙 이사를 가버리게 되고 결국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환경이 오히려 다른 시선을 갖게 도와 주었습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사귀는 친구는 없지만 언제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친한 사람은 단순히 같은 공간을 오래도록 함께 공유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진짜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을 만나더라도 그와 나의 영혼의 지향점이 같다면 우리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을 오래 살아왔지만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주변에서 쉽게 관찰됩니다. 당장 이곳의 모습만 보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마다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서 사람들을 연합했다가 갈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과거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친했던 이들이 어느샌가 마음이 갈라져 반목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흔합니다. 그래서 '친교'라는 의미를 새롭게 정돈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친교는 세상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목적지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목적지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친하고자 한다면 다음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가? 2. 그 목적은 변함없는 것인가?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이런 질문에 부합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진정한 신앙이 우리를 진정한 친교로 이끌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올바른 가르침을 전제로 합니다.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다보면 내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와 그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의 목표가 전혀 딴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측은 부자들의 하늘나라를 기원하고 다른 측은 가난한 이들의 하늘나라를 기원한다면 언뜻 비

저주 아래 있는 이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갈라 3,10) 법은 어기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어길 때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줍니다. 무언가를 잘한다고 법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것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교통 신호를 잘 지켰다고 경찰이 와서 상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도를 어기거나 차선을 어기면 와서 딱지를 끊어줍니다. 사제가 평일까지 열심히 강론을 열심히 준비한다고 교구에서 상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건 원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주일과 의무 축일에' 강론을 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교회법적 근거를 따라서 사제를 교구에 고발할 수 있습니다.  교회법 767조 2항 회중과 함께 거행하는 주일과 의무 축일의 모든 미사 중에 강론을 하여야 하며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이를 궐(생략)할 수 없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죄를 짓는 이들, 혹은 짓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죄를 짓는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기 위해서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이들은 그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위를 수정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런 법을 살펴보는 이들도 다른 이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이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이미 율법 시대 못지 않은 수많은 규정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로 지금까지 해 온 바 그대로 따라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수동적으로 형성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서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제가 가끔씩 놀라는 건, 어르신들이 빈 땅을 하나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고추를 심을지 깨를 심을지, 야채를 심을지 잘 알아서 어떻게든 놀리는 땅이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영혼의 텃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