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영혼의 질병이 어려운 이유

몸이 아프면 즉각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 치유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사라는 직분에 대해서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던 몸이 그를 만나고 나면 개선되는 것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질병의 문제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어린 영혼이 세속이라는 가치에 물들어 화장을 한껏 하고 그걸 인스타에 올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아이가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나이대에 그럴 만한 일이라고 하고 쉽게 넘어갑니다. 사람의 가치를 자신에게 값비싼 선물을 해 주는 기준으로 식별하고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을 알아볼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재산상의 문제가 생겨서 형제간에 싸움이 나도, 누군가에게 극도의 시기를 느껴서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며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에 대한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아픈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안다면 치유하고 싶어질 것이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울은 유대인의 핵심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운 율법의 아들이고 자신이 하는 행동은 그 자랑스러움을 더해주는 훌륭한 행동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스스로 아프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신이 하는 일을 뿌듯해 하고 열정과 더불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고을마다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필리포스는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의 구역이었던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필리포스는 사람들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중풍 병자와 불구자를 낫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고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 기쁨이 넘치는지, 아니면 내가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할 때 마다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지를 보면 내 영혼이 다른 이들을 살리는 영혼인지, 죽이는 영혼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0)

댓글

준 요셉님의 메시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사람은 어떤 것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일상의 평온함은 물론, 가정과 주변에서 들려오는 기쁜 소식에도 그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점점 무기력 했고, 생기 마저 잃어 갔습니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원인을 찾고 빠져나오려고 안간힘 해보았지만 나아지지 않습니다. 희망 할수 있는 것이 없게 되고 살아갈 의미 마저 잃은 그는, 절망이라는 어둠 속으로 깊숙히 빠져 들어만 갔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느날, 그는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엔 그것에 무심했지만 그 빛에 익숙해질 무렵, 그는 그 빛을 따라가게 됩니다. 작고 가느다란 빛은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점점 더 밝고 큰 빛으로 그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눈이 부셔와서 제대로 볼수 없었지만, 자신을 향해 비추는 그 빛을 향해 그는 손을 내밀었고, 자신이 내민 그 손을 꽉 잡아주는 크고 따뜻한 손길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볼수 있고, 이해 할수 있어야 했던 신앙.
그래서, 온통 '나'로 채워졌던 신앙..

'영혼의 질병'의 경험은 정말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허락하셨을 때는 반드시, 제대로 고쳐주시려는 의지가 있으셨습니다.
낫게됨이 완성이 아니기에, 매일 당신의 초대로 향한 미사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