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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아, 어리석은 자들이여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마르 11,18) 어리석은 자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을  죽여 없애려 하고 두려워하다니.  하지만 그들은 장님에 귀머거리.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다네. 그들이 겁내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전전긍긍하며 모든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하느님은 알지 못하고 있다네 그들은 샘을 내고 서로 다투어가며  남들보다 뛰어난 척 하려 하지만 그들이 얻는 것은 서로에 대한 증오 뿐.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니 그것은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라네 그건 바로 주인이 없는 세상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세상 현자들은 그곳을 일컬어 지옥이라 하였지. 들풀들은 사라지고 풀꽃은 스러지고 오직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나무만이 찬란할지니 그분은 바로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오소서 주님. 아멘.

모든 것에 존재하는 이유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밀어닥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일은 나 자신을 바꿈으로써 해소가 됩니다. 내가 담배를 태워서 내 폐가 아픈 것이면 담배를 끊어야 하지요. 내가 곧잘 욕설을 해서 주변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지고 그 사람들이 나에게 싫은 감정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면 내가 욕설을 멈추면 됩니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 낸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의 외부에서 나에게로 밀려드는 일이고 그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셨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한국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부모님을 선택하지도 않았지요. 헌데 우리가 이렇게 태어난 것은 바로 그 장소와 그 위치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사람은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 기뻐하게 되지요. 자신에게 다가오는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나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현재에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삶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 바로 우리가 이 짧은 생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이지요. 

되살아난 예수님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건이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진 사건이라 오늘날의 우리에게서는 기억에서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의 눈 앞에서 매를 맞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보면서도 정작 못박은 이를 용서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 강렬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그분 안에 존재하는 힘의 근원을 따르려고 노력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소위 ‘사건’은 2000년 전에 그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끝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 일어난 일을 오늘날 우리들이 ‘재현’하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불의에 맞서서 우리의 사랑으로 그 불의를 끄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에 생생히 살아있는 새로운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우리들의 힘에 상응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당연히 십자가니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만큼 우리에게 삶의 보람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실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될지, 얼마나 많은 몰이해에 부딪히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세상은 변덕스럽고 심지어는 악하기까지 해서 선의 빛을 보는 족족 꺼버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할 테니까요. 여러분 내면에 존재하는 선의 힘을 절대로 양보하지 말고 더욱 더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의인의 괴로움

그 의인은 그들 가운데에 살면서 무도한 행실들을 보고 듣느라고 그 의로운 영혼이 날마다 괴로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2베드 2,8) 의인의 괴로움은 자기 자신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조성해 낸 어두움에 힘들어하지만 의인은 자기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문제로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반면 의인들은 주변 사람들이 조성해 낸 문제로 힘들어합니다. 일단은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도 힘든 일입니다. 어리석은 이가 벽에다가 자기 머리를 찧으면서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만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남도 괴롭힙니다. 이런 모든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의인들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의인은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살아가지 않습니다. 과거 유대 지역에는 악인들에게서 멀어지겠노라고 분리되어 살아간 에세네파 사람들이 있었지요. 유명한 성경 사본인 사해 문서는 바로 그들이 지니고 있던 성경이었습니다. 그토록 분리되어 생활한 탓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삶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리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구요. 우리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세상과 잡탕으로 뒤섞여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분을 올바로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에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그 세상 안에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그 괴로움에서 반드시 구해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 희망으로 지금 여기서부터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

어쩌면 삼위일체라는 말마디 자체가 지나치게 무겁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셋이 하나로 일치한다는 게 핵심인데 말마디가 너무 고상해서 듣는 순간 우리가 긴장하게 되는 걸지도 모릅니다. 하나됨, 그럼에도 고유함을 간직함이 핵심입니다. 물론 이는 물리학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지상의 질서에는 맞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느님께서 이 물리의 세상을 만들어 내신 창조주인데 굳이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의 법칙에 종속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하느님의 하나됨은 보다 천상적인 것이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고 다가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 자체도 물리의 법칙을 넘어서는 내밀한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영’이라고 부르지요. 두 물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치 두 진흙을 한데 ‘뒤섞어’ 놓을 수는 있겠지만 이를 두고 완전히 하나 되었다고 하는 것은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두 영혼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질료가 없고 순수해서 얼마든지 하나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하나되는 데에 핵심은 그 영혼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이 하나되는 데에 관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는 서로의 의지를 같은 것으로 만들 때에 하나될 수 있습니다. 성부가 의도하는 것을 성자가 그대로 이행하려 하고 성자가 의도하는 것을 성령이 따라 수행할 때에, 그리고 그 성령을 받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성령께서 하시려는 대로 내어맡길 때에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자면, 오늘 내가 일하는 중에 짜증나고 화나는 부분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바람직한 모습을 성찰하고 그런 나의 부정적인 면모를 줄여나갈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의지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행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나는 삼위일체와 일치된 삶을 살아가게

치와와 이야기

어린 시절 놀러간 친척집에는 치와와라는 강아지가 있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듯이 나역시도 그랬다. 헌데 어느날 찾아간 친척집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치와와가 코너에 몰려 앞다리를 들고 벌벌 떨고 있었고 그 앞에서 친척 어른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뭘 하는 거냐고 물으니 ‘교육’을 시키는 중이라고 했다. 강아지가 집안에 싸 놓은 똥을 두고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라고 혼쭐을 내는 중이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마음의 아픔을 견뎌가면서 어른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만 알았다. 헌데 이제 내가 어른이 되어 다시 그 장면을 곱씹어 생각해보니 그건 그 어른의 미숙함에 불과한 일이었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수많은 방법 중에 호통과 질책과 공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들으면 넘어가고 말을 듣지 않으면 사정없이 혼을 내는 방식…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이 그 장면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건 좋지 않은 장면이라고 말해주고 있었고 다른 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지만 어린 나의 마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 역시도 미숙한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적지 않은 수많은 요소들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미숙함이 또다른 어두움을 양산해 내고 그 어두움으로 피해를 보는 무죄하고 나약한 이들이 존재하게 되는 구조. 그래서 신앙인들이 필요하다. 신앙인들은 십자가로부터 사랑을 배워 다른 이들을 구해 내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질책과 힐난은 어떤 잘못을 당장 멈출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그 내면 안에 무언가 부당하고 억눌린 느낌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남아 어떤 성향, 또는 성격을 만들어내게 된다. 미숙함을 사랑으로 보듬어 스스로 분별하고 고치게 되는 것과 미숙함을 일단 ‘정지’ 시켜 놓은 사람의 훗날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된다. 우리는 완벽

야고보 사도의 열정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야고 4,2-4) 야고보 사도의 이런 구절을 들으면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건 같은 말씀을 바라보는 방향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이미 선하게 살고 있는 이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악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기쁨으로 와 닿는 말이겠지만 반대로 자신의 삶이 악으로 기우는 이들, 세상의 유혹들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이들에게는 거슬림으로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의 조금은 강한 듯한 표현들은 듣는 이에 따라서 저마다 다르게 와 닿게 마련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바오로 사도 못지 않게 열정이 대단한 사도였습니다. 그의 열정은 복음서 어디에 특별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 사도가 저술한 편지글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영혼들을 구하겠노라는 열정에 가득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바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칩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들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뚜렷합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 청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가감없이 솔직히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가장 근본에 올바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왔다리 갔다리를 반복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모르긴 해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안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표현은 좋은데 사실 그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엮일

방언/심령기도/새로운 언어

방언 / 성령을 받은 신자가 황홀 상태에서 말하는 내용 불명의 말(개신교에서 주로 쓰는 말) 심령기도(신령한 언어) / 방언의 뜻과 거의 비슷하나 추가하자면 성령을 받은 신자들이 자신을 개방하기 위해서 하는 일종의 훈련이자 드러나는 외적 기도 형태(정해진 틀은 존재하지 않으나 구체적인 소리를 내고 혀를 다양하게 놀리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 하지만 해석의 은사가 뒤따른 이들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으며 잡다한 엉뚱한 개인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말’이다. 또한 그것이 올바로 들리지 않는 때도 있으며 그러한 때에는 반드시 해석의 은사를 입은 이가 이어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적 근거]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 2,4)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사도 2,11)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도 10,46)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사도 19,6)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1코린 14,2) 나는 여러분이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언할 수 있기를 더 바랍니다. 누가 해석을 해 주어 교회가 성장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예언하는 이가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보다 더 훌륭합니다. (1코린 14,5) * 코린토1서 14장에 신령한 언어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주된 의견이 나오니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언어 / 전에 사용하지 않던 언어. 우리가 믿음의 본격적인 생활에 이르기 전에는 낡은 언어, 즉 이해관계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세상의 언어를 하게 되지만 하

질문의 의도

정말 무언가가 궁금해서 더 알려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된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떠보려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측에는 반응을 하지 않고 흘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강한 주장을 밀어넣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던지는 자극적인 질문에 반응해주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공격적 의도가 자신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어 줍니다. 그것은 바로 ‘덜 형성되었다’는 것이고 또 심한 경우에는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행동을 줄여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닌 그 영적 어두움은 스스로를 눈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르려는 악을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내서 그것에 상대가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또 거기에 상응해서 역으로 반응하면서 점점 싸움의 강도와 크기를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영’이 무엇인지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올바로 알아채지 못하면 우리는 그만 우리의 의지를 거기에 맡겨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옳다’고 믿고 행동했던 것이 최종적인 결과물로 어둠의 영이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어둠의 영의 하수인의 노릇을 하게 된 셈이지요.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참아줍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칭하는 이들은 자신의 의로움이 진정 하느님에게서 오는 참된 의로움인지 아닌지를 늘 깨어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