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9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생각을 바꾸다

  신앙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마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변화될 수 없는 것이면 애시당초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삶이 고정된 것이고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애쓰는 것은 모두 일종의 쇼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원래부터 정해져 있는 길을 두고 우리는 공연히 애쓰는 척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우리 스스로가 변화시켜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고 그분 이전에도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어 우리의 삶에 변화를 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의로움의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은 모두 아름답기만 하고 존중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 가운데에는 ‘의로움’의 길이 있고 그렇지 않은 길, 즉 ‘타락의 길’이 있습니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이 길의 구분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의로운 길을 마치 독불장군의 길인 양 평가절하시켜 버리고 반대로 타락의 길은 마치 그 길이 엄청 좋은 것인 양 치장하는 데에 정신이 없습니다. 간단한 예로 무턱대고 많은 돈을 버는 길은 그 돈벌이의 결과로 인해서 무조건 좋은 길이 되어 버립니다. 반대로 의인이 아무리 고생해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산다고 해도 그 결과가 세속적으로 좋지 않은 것이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멍청한 사람으로 취급 당합니다. 성소의 길을 젊은이에게 소개하면 그들은 그딴 길을 왜 나한테 요구하느냐는 식으로 대꾸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또를 사서 1등해서 일확천금을 벌 수 있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의로움의 길‘을 꾸준히 보여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 무쌍한 사람의 여정 가운데 이 길에 대한 가르침을 얻어서 생각을 바꾸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그 대표격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의 극기생활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양이 되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일을 하는 방식

바오로 사도는 일 하는 방식에 대한 서술을 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방식과 세속적인 방식으로 나뉘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신앙 안에서 이루는 일로서 꽤나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적인 방식 가운데 첫째는 하나의 몸이라는 개념입니다.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라고 표현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것처럼 훌륭하게 일하는 방식은 세상에 따로 없을 것입니다. 최근들어 배송 회사들이 로봇을 두고 일을 합니다. 그러면 저마다 계획된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합니다. 같은 프로그램 안에서 움직이기에 서로 부딪힐 일도 없고 마치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게 됩니다. 반면 인간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집단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로 뜻하는 바가 다릅니다. 그래서 같은 가족 안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곧잘 충돌이 일어납니다. 영적인 방식의 두번째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움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하나로 일치하고자 해도 분명히 결함은 존재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완벽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위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격려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로 나누어집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아픈들 예수님만큼 아플 것이며 내가 억울한들 예수님만큼 억울하겠는가?”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격려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특히 우리가 받는 고통의 의미를 늘 되새겨 줍니다. 성령 안에서 친교는 거룩한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악인들도 서로 친합니다. 서로의 이기적 목적이 맞아 떨어지면 그들은 서로 친하게 지냅니다. 필요하면 술도 함께 마시고 운동도 같이 하면서 친교를 나눕니다. 그러다가 이득이 틀어지면 그때부터 원수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악인들의 친교에 비할 게 아닙니다. 성령 안에

공평에 대한 고찰

우리는 100개의 사과를 가지고 두 사람이 나눌 때에 둘 다 50씩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사과를 수확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 기울였고 다른 누군가는 그냥 분배할 때에만 도착을 했다면 그들에게 똑같이 주는 일은 공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사람에게는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5명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혼자 뿐이라도 그렇습니다. 이 밖에도 올바른 공평을 회복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비록 일은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일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애가 있어서 높은 곳에 있는 사과를 수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처럼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평만 해도 꽤나 복잡합니다. 하느님의 공평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잣대로 그분의 업적을 살펴보면 엇나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을 공평하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의인은 고통 당하고 악인은 편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수백억을 갈취하고도 변호사를 고용해서 감옥에 들어가지도 않고 반대로 마음이 양선한 이는 이런 저런 이들의 악행에 고통당하는 현실이 너무나 부조리해 보이고 그런 세상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이 너무나 불공평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공평을 생각할 때에는 중심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합리성에 공평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공평하시니 우리의 생각을 그분의 공평성에 맞추어 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즉, 지금 눈 앞에서 불공평해 보이는 모든 일들 속에도 하느님의 공평이 작용한다는 것을 굳게 신뢰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밝히 이해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들고 있는 휴대폰을 그냥 쓸 뿐 그 안의 기능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과학의 업적이라도 우리가 모든 것을 밝혀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과학적 공식 속에 존재하는 숫자가 왜 거기 들어 있는지 알지 못

풍요로움의 의미

부가 누적되면 행복할까요? 그러면 세상의 모든 부자들은 아무 걱정도 없고 마냥 행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부를 소유한 이들과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이라면 상황이 마냥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아니, 때로는 가진 것이 없는 이들과 진정으로 생활을 나누어 본 사람이라면 그들 안에서 소박함과 기쁨을 더 자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다행히 저는 두 환경 모두 머물러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치부되는 곳에서 가난한 이들과 머물러 보았고 동시에 미국이나 캐나다를 다니면서 나름 지니고 산다는 이들과도 마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값비싼 음식과 화려한 삶의 배경 뒤에 존재하는 어두움을 바라볼 수 있었고 소박한 삶 속에 피어나는 정겨움도 체험해 보았습니다. 사실 가진 사람들이 나눔에 더 인색합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가진 것의 전부를 내어놓는가 하면 부자들은 저마다 있는 가운데 일부를, 자신의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일부를 주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실천하는 그들의 내면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왜 나눌까요? 간단합니다. 자신도 가난해 보았고 아쉬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선입니다. 반면 부자들은 어떻게 나눌까요? 그들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만큼의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동정을 하긴 하지만 동냥에 가까운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상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도움이기보다는 내가 주어서 마음 편한 정도의 도움인 셈입니다. 겉은 부유하지만 내면의 풍요로움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인색해지고 움켜쥐는 데에 혈안이 됩니다. 주머니에 십원도 없는 사람이라면 누군가 초대하는 식사 한끼라도 감사한 법이지만 한달에 이자만 몇백만원이 나오는 사람이라면 맛있는 식사, 색다른 식사가 아니면 가치없는 것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들

길을 떠날 때에

오늘   가르침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당신의   제자로서   마음을   굳힌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과외   수업입니다 .  그래서   마음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합니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는   것은   아니고   또   누구나   다   응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모두가   수도자가   될   수   없고   모두가   사제가   될   수   없습니다 .  저마다의   고유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 소유에   대한   집착의   포기를   말합니다 .  동시에   소유를   포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하느님에   대한   의탁을   의미합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특별히   더   많은   포기를   요구   받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힘에   의탁하지   않을 내적   포기를   의미합니다 .  무턱대로   가진   것을   내던진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  가진   것이   많아도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잘   인지하고   있고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고   올바른   사용처를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진   것이   쥐뿔도   없는데   마음   속   탐욕은   어마어마한   사람도   있습니다 .  전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중이고   후자는   겉으로는   없지만   마음   속으로   다   가진   사람인   셈입니다 . 머물러라 현세에   대한   올바른   처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  이는   그곳에   집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