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 즉 등불에 불을 밝혀두지 않은 처녀들이 하늘 나라에 함께 들어가지 못하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름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을 지니고 등불을 밝혀 둔 삶은 깨어있는 삶이고 거룩한 삶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기름이 없는 삶은 등불이 꺼진 삶이고 잠들어 있는 삶이며 거룩하지 못한 삶입니다.
여기서 잠깐 거룩함을 짚고 넘어갑시다.
거룩함을 살피기 전에 먼저 거룩하지 않은 것, 1독서의 표현에 따르면 더러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뚜렷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불륜' - 즉 자신의 배우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놀아나는 것은 더러운 행위입니다.
'색욕으로 아내를 대하기' - 아내와의 거룩한 사랑의 관계를 오직 '욕정'으로만 대하는 것도 더러운 행동이 됩니다.
'이 일로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그를 속이는 일' - 이런 종류의 어둠의 행위로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그를 기만하고 속이는 것(다윗왕의 예)도 더러움에 속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라 그들이 빠져 있는 어두움을 구체적으로 적느라고 '불륜'에 집중되어 있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더러움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행동들이 더러운 것이지만 그런 행동들이 기인하는 구체적인 원인은 내면에 존재하는 뒤틀린 영혼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를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과 '색욕'이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반대로 거룩함을 살펴봅시다. 더러운 행위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룩한 행동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거룩함은 외적인 틀에서 기인합니다. 기도를 더 많은 시간, 더 어려운 자세로 하면 거룩해 보이고, 평일 미사를 더 많이 나오고 집에 교계에서 유명하신 분과 사진을 찍어 두면 거룩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거룩함의 틀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런 행동들은 '거룩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행동이 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도 식별이 필요합니다. 이런 거룩한 행위들을 '교만'한 마음으로 하면 도리어 우리의 죄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사이가 술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길모퉁이에 서서 양팔을 들고 보란 듯이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거룩함은 사실 전혀 다른 데에서 그 기준점을 찾습니다. 해맑은 어린아이가 거룩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쾌활하게 웃는 이가 거룩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특정 기도문이나 기도 방법을 모른다고 거룩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거룩함은 오직 하나의 근원에서 기인합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분과의 유대관계입니다. 즉, 거룩하신 분의 거룩한 뜻을 올바로 잘 이해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입니다.
향수를 지닌 병이 조금 못생겼다고 향기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라면 그의 모든 행실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묻어납니다. 우리는 바로 이 '기름'을 준비해 두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등불을 밝히는 비결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신랑이 다가올 때에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의 환대를 받아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족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이 기름은 자신에게 부족할 때에 다른 이에게서 '사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둔감할 때에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이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그에 상응하는 때가 있습니다. 미리 준비했었어야 하는 기름을 뒤늦게 마련해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가운데 이미 문이 닫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행을 바라는 신앙생활은 불행한 신앙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행히 죽기 전에 기름을 마련하고 주님의 도래를 기다린다면 다행이겠으나 병석에서 자신의 의지가 전혀 섞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 대세를 받는다면 그 신자 가족들에게는 위안이 되는 일이겠으나 그의 영혼이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을지는 여러 모로 의문입니다. 나의 선택이 가능할 때에 깨어 있어야 하고 신앙을 선택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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