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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사제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좋은 사제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는 좋은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하는 사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취미 활동도 하면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사제는 좋은 사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좋은 사제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어느 순간부터 그 사제는 재미없는 사제가 되고 자신들이 노는 데에 같이 흥을 북돋아 주지 않는 사제라고 합니다.


강한 것은 강해서 싫다 하고 무른 것은 물러서 싫다 합니다. 세상에 다가서려는 노력은 그것대로 싫다고 하고 하느님께 다가서려는 노력은 그것대로 맘에 안든다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점점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기성입니다. 사람들은 '진실로 좋은 사제'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갈망을 채워주는 사제'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게 뭐든 말이지요.


이는 여러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저마다 고유한 인격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없고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부모도 마음에 안들고 자식도 마음에 안들고 배우자끼리도 서로 마음에 안들고 형제들도 마음에 안드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선호도만을 추구하는 이 근본적 이기성 앞에 '신앙의 선포'가 놓여 있습니다. 신앙의 선포는 사실 사람들의 인간성에 근본적으로 좋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닙니다. 누가 십자가를 인간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즉 고통과 형벌과 죽음은 인간에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고 피해야 할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뜻 외견으로 신앙적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자랑스레 말하지만 정작 이 '십자가'가 그 힘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에서야 비로소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외아들에게 내어준 십자가는 단순히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의 어두움을 교정하고 바로세워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여정을 걷도록 도와주는 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 앞에서 거꾸로 행동합니다. 자신이 듣기 싫은 말씀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진정한 신앙의 길을 멍청하다고 비웃습니다. 요즘 세상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잘 안보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쉽고 편안한 여정을 찾아 나섰고 안락하고 더 쾌락적인 길을 찾아 나서서 지금의 우리 사회를 형성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또한번 선포됩니다. 그것은 듣기 좋은 말이라서가 아니라 선포되어야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희망이 없다지만 여전히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따르는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사람들 앞에 선포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댓글

고옥숙님의 메시지…
신부님께서는 늘 불꽃같은 열정으로 하느님 말씀을 전해주심에 뼈저리게 감사드립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신부님 말씀을 되새기면서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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