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의미'를 추구하고자 애를 씁니다. 어르신들 가운데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는 '내가 가치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뭔가 계속해 나가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냉혹한 세상 속에서 무가치하게 여겨져 흔히 하는 표현처럼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해 버릴 테니까요.
세상은 사람의 가치를 현세에 국한합니다. 그래서 현세 안에서 뭔가를 생산하고 눈에 드러나는 활동이 가치로운 것이라고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반면 그런 눈에 드러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삶을 무가치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내면적으로 공허한 존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초라해 보여도 내면으로는 너무나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이들도 있습니다.
할머니들의 열심한 기도는 세상에서는 무가치한 일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을 다른 취미 활동이나 하는 것이 낫지 공연히 묵주나 돌리고 앉아서 뭐하느냐고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을 담은 기도의 힘은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궁극적으로 신앙인은 세상 안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체계와는 전혀 딴판의 것입니다. 아니 궁극적으로 신앙인은 세상의 가치들을 최종적으로는 무가치하다고 해버립니다. 그러니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절묘하게 표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이 지상에 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이 보람이라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지상의 삶의 모든 의미 안에서 영적인 열매를 맺는 것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상의 모든 가치들은 영적인 가치를 얻어내기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런 형태의 신앙인의 삶은 사실 여전히 올바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현세의 삶의 확장을 꾀합니다. 그러면서 신앙과 현세의 삶의 실질적 축복을 교묘히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의 진정한 원의,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은 곧잘 평가절하되어 현세의 고통을 눈가리는 임시적인 위안 정도로 치부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보다도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현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영원'의 결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참된 희망은 사라져 버릴 세상이 아니라 영원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세상의 현혹에 넘어가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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