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형제’는 그리스도화 된 이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 가치를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내적 가치를 현실화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삶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바를 추구하는 것이고 나아가 죽음까지도 그분을 위해서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을 의미합니다.
돈벌이를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상의 생명을 위해서 돈벌이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게 끝일까요? 여기서 좀 더 나가면 나를 벗어나지만 여전히 나의 범주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서 돈벌이를 합니다. 이 역시 앞서 성경 구절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의 범주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동물도 그렇게 하니까요. 자신의 존재감을 잇는 이를 위해서 하는 활동은 동물들도 지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동물의 왕국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동물들이 자녀를 헌신적으로 기르는 모습을 보면 때로 못된 부모보다도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 버린다면, 즉 자신의 생명과 안락 유지와 자녀들을 위한 헌신 정도에서 그쳐 버린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이들이고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그리스도입니다. 즉 우리에게 허락된 가치들은 우리의 부의 축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이를 도와서 그들이 안정을 회복하고 그들도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을 확장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 봅시다. 죽음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살아있는 대부분의 시간 죽음을 피해서 도망다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본질을 이해한 사람에게 죽음은 이미 끌어안아야 하는 무언가가 됩니다. 죽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음이 당연한 생의 귀결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으로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반적으로는 기대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 하나 듣는 이가 있어서 그에게 빛이 남겨진다면 그는 그 가르침을 붙들고 남은 생을 헌신하며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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