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0월, 2019의 게시물 표시

할로윈에 대한 단상

문화라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한국인의 문화가 있고 남미인은 남미인의 문화가, 또 더 세부적으로는 경상도의 문화, 전라도의 문화, 어느 학교의 유행, 어느 나이대의 공통된 관심사 등등 참으로 다양하게 세분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문화'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요소를 피하는 것입니다. 문화라는 이름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활동들이 '식별'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학교에서 '왕따'가 문화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죄 없는 피해자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문화에는 긍정적이고 살려 나가야 하는 문화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정적이고 도태되어야 하는 문화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의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음주문화는 여러 차원에서 재고되어야 할 문화이고 한국 사회의 고유하던 전통 문화도 좋은 것은 살리고 그릇된 것은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할로윈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조금은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과 2000년 전에만 해도 한국 내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문화가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영역이 '상업성'에 물들어 있고 또 분별력이 모자란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올바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할로윈이라는 새로운 문화 안에는 적지 않은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신중하게 살피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분별을 올바로 적용해 보기도 전에 이미 '유행'

좁은 문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그 길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그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목적이 분명할 때에는 수고스러운 고생도 얼마든지 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겠다는 욕구 하나로 형제간에 소송을 걸고 다툼을 하는 일은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소송이 꽤나 지루하고 힘든 일임에도 돈에 대한 탐욕으로 기꺼이 그것을 형제라고 불렀던 이에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한 아내가 지금의 모자란 모습의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수고스러움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한 아내가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사랑을 쏟아붓고 남편을 섬긴다면 훗날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성실함과 꾸준한 선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 훗날의 미래상을 올바로 그려내지 못하고 따라서 현재의 인내의 시간을 참아 견디지 못해 화를 쏟아붓고 주변에 남편 욕을 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가올 미래는 더욱 암울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최종적인 올바른 목적지를 아는 데에서 나오는 열심인지 아니면 주변에 드러내 보이기 위한 열성인지는 스스로 잘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뜻을 모른 채로 거짓된 열성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나아가 이웃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를 원하시는데 정작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사랑하고 이웃에는 그릇된 모범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외적인 잣대로 열심해 보인다는 활동만 열심히 하면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 줄 알았던 것입니다. 평일 미사를 열심히 나가고 기도 횟수를 늘리고 사람들의 시선에 좋아 보이는 일을 잔뜩 하면 하느님이 인정해 줄 줄 알았지만 실제로 하느님이 원했던 것은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들어갈 것이라고

"신부님은 아무나 되나요?"

사제로 살아오면서 이런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사제직의 특별함을 인식하는 신자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 안에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제직의 권리 바오로 사도는 가장 약한 지체가 가장 잘 보호를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이 눈꺼풀에 싸여 있고 눈물샘이 늘 눈을 적시는 것처럼 중요한 지체는 약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많은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사제직은 '특별해' 보이게 됩니다. 사제는 늘 신자분들이 사랑해 주시고 챙겨 주십니다. 이는 양을 치는 목자가 양에게서 필요한 것을 취하듯 사제로 살아가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영역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다음의 조건이 뒤따릅니다. 사제직의 책임 사제가 사제인 이유는 '사제로서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에게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신자들을 돌보아야 하고 신자들을 위해서 헌신, 봉사해야 합니다. 이 직무에 헌신하기에 신자들이 사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받는 것 이상으로 많이 내어 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피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음을 전할 상황이 아니라 할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또 구체적인 사랑으로 응답하는 신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제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라는 의미가 마냥 술자리의 흥취나 즐기고 고급진 운동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