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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

신학교 시절 '작업'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신학생들이 수가 많았기 때문에 신학생들이 신학교를 가꾸는 작업들에 동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작업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자주 했던 일은 신학교 정원에서 자라는 잡초를 뽑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잡초를 뜯다 보면 때로는 그 뿌리가 어마어마한 것에 놀라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커다란 잡초를 뜯다가 잔디도 같이 뜯기는데 잔디는 위에서는 저마다 작은 풀처럼 솟아나 있지만 아래에서는 서로 강한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서로 강하게 연결된 잔디처럼 우리 역시도 한 주님에게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들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는 것은 그 내적인 유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발가락과 손가락이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것처럼 하느님을 믿는 이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아버지와 그리고 우리의 목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요한 10,14) 젊은 시절 술자리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그렇게 밤늦게 모여서 서로 우정을 다지는 것이 엄청 중요한 일이었고 그렇게 형성된 우정이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달라지면서 몸이 멀어지면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졌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나도 평생을 만나 온 것 같이 마음이 이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사는 곳이 다르고 출신지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내면 속에 같은 떨림, 진동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같은 양들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당 사람이라고 모두 같은 양 떼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단계를 하면서 그 수단으로 성당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세속적 목적으로도 얼마든지 성당을 다가서는 사람은 있습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는 이라야 한 목자 아래에 있는 한 양 떼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에는 아직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

세상은 그분을 안 적이 없다

강렬한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체험을 평생토록 잊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한 마디의 말이나 단 한 번의 경험은 평생을 두고 그에게 남아 있습니다. 사실은 하느님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하느님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은 그 체험을 평생을 두고 기억하게 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렇다 할 만한 하느님의 체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딱히 기억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기억은 세속의 삶에 기반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라고 부를 만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성당을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혹은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가 그 체험의 기준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성당 안에서도 얼마든지 세속적 체험을 기반으로 한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은 성당 안에서 자신이 원하던 형태의 것이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성당을 다닐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냉담에 빠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러 왔는데 커피가 다 떨어지면 거기에 있을 이유는 없는 거니까요. 하느님의 체험을 한 이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때로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어리석은 삶이 분명합니다. 일요일에 집에서 쉬어야지 왜 쉬는 날까지 성당에 가야 하는지 세상적인 기준에서만 보자면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과거에는 성당에 가면 현세적으로도 즐길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이유들이 더욱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굳은 '믿음'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성소(聖召) - 거룩한 부르심

성소(라고 하면 신자들은 대부분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성소는 어찌보면 결혼 성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의 7성사 가운데에는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로 혼배와 성품 성사가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만이 성사, 즉 거룩한 일이 아니라 혼인 생활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도 거룩한 일입니다. 혼인이 성사인 이유는 그것이 부르심 받고 응답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개인이 서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신앙인으로 이 땅에서 완수해 나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혼인 생활에는 좋은 것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혼인 생활은 배우자가 죽음으로써 마무리되기까지 지고 가야 하는 거룩한 사명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강림 이후에 자신에게 주어신 소명을 이행합니다. 오늘 독서의 그의 말 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문제로 인해서 법정에 서고 신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감옥에도 갇히고 박해도 당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도 그와 같은 처지를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 풍조가 있고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꺼리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금의 사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쉽지 않은 일로 만드는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혼인 성소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혼인은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일종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고자 애쓰는 이는 어떻게든 이 소명을 받아서 살아갈 것입니다. 혼인은 단순한 애정의 끌림이나 현실적인 계산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혼인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영혼의 질병이 어려운 이유

몸이 아프면 즉각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 치유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사라는 직분에 대해서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던 몸이 그를 만나고 나면 개선되는 것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질병의 문제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어린 영혼이 세속이라는 가치에 물들어 화장을 한껏 하고 그걸 인스타에 올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아이가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나이대에 그럴 만한 일이라고 하고 쉽게 넘어갑니다. 사람의 가치를 자신에게 값비싼 선물을 해 주는 기준으로 식별하고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을 알아볼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재산상의 문제가 생겨서 형제간에 싸움이 나도, 누군가에게 극도의 시기를 느껴서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며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에 대한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아픈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안다면 치유하고 싶어질 것이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울은 유대인의 핵심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운 율법의 아들이고 자신이 하는 행동은 그 자랑스러움을 더해주는 훌륭한 행동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스스로 아프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신이 하는 일을 뿌듯해 하고 열정과 더불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고을마다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필리포스는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의 구역이었던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필리포스는 사람들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중풍 병자와 불구자를 낫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고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내

반대하다

반대하다, 반항하다, 반기를 들다 모두 비슷한 표현입니다. 누군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역행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독서에서는 스테파노와 그에 대항하는 이들이 등장을 합니다.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라고 표현됩니다. 백성은 평범한 사람을 말하고 원로는 명예로운 이들을 말하며 율법 학자들은 학적 권위를 지닌 이들을 말합니다. 이 세 계층이 하나도 예외 없이 스테파노에게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강하고 광범위한 반대 속에서 스테파노는 용기를 잃을 법도 한데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해야 하는 말을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해 스테파노에게 물리적 제재를 가합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나아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이들의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미 그 시작점에 내적인 반대가 선재합니다. 세상의 모든 외적인 형태의 악은 이미 그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진리에 대한 반항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세상은 복잡한 듯이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진리를 쫓는 사람들과 그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로 나뉘어집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 그렇지 않은 이들의 부류는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욕구'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복음에서도 유사한 대립구도가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진정한 빵을 주시는 분'을 소개하고자 하고 군중은 '빵'을 섬깁니다. 그래서 둘은 '빵'이라는 유사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주고 받는 셈입니다. 군중은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세속의 빵을 예수님께 달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에 이끌어 줄 하늘의 빵을 받아 먹으

무엇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것인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막달레나의 경우는 눈물에 눈이 가려서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그들과 한참을 걸어가는 데에도 알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외적 용모로'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단순히 그의 외모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 습성과 말투를 통해서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알 수 있도록 구멍난 손과 말을 보여주시고(외견의 유일한 남은 징표) 나아가서 부활하셨음에도 그들 앞에서 구태여 먹을 것을 찾아 물고기를 잡수시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보는 일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 '영으로' 누군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에 힘입은 이들은 '동일한 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드러납니다. 먼저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완성에 힘쓰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두번째는 성경에 기반한 복음의 핵심 선포를 가르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세번째는 진리의 선포, 즉 선교에 대한 노력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노선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셈입니다. 사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더이상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서 멀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십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협조자의 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앞서의 의지를 담

계명을 지키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1요한 2,4) 우리가 훗날 가게 될 하늘 나라는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완전한 방법은 그 집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가는 사람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다양한 표현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이렇게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친밀함'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양자로 편입되어 식구로 들어올 수는 있지만 문제는 서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근함', '친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라고 할 때에 그가 천주교 신자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교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고, 가톨릭 문화나 신학적 지식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필요한 일이고 하느님은 전혀 다른 것을 보십니다. 하느님은 숨어 있는 것을 보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내면을 관찰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친교가 얼마나 형성되어 있는지를 바라보십니다. 그것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정해져 있는 율법 규정을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지키는가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계명을 근본적으로 제시하시는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영역에 얼마나 진정으로 동의하는가 하는 것, 즉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일도 없으면서 친한 시늉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올바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과 진실한 친교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훗날에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신의 집에 그분의 아들과 딸로 들

욕구에 따라서 움직이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사도 3,14-15) 사람은 복잡한 것 같아도 단순합니다. 저마다 '욕구'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다양한 차원에 걸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빵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됩니다. 그래서 사탄도 예수님을 빵으로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고차원적인 욕구가 존재합니다. 명예와 관련된 자아실현의 욕구와 같은 것입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설령 밥을 안 먹어도 내가 지금껏 쌓아 온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못견디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아가 악마는 결국 '나자신'이라는 것을 숭상하도록 합니다. 최종 권력에 대한 욕구를 바탕으로 한 유혹이자 하느님을 앞에 둔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유혹을 의미합니다. 첫 인간이 걸려든 유혹이기도 합니다. 이런 다채로운 종류의 유혹들 앞에서 인간은 '의로우신 분'의 초대와 그분에게서 얻는 진정한 영광,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분 자체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리를 죽이는 방식이며 생명의 영도자를 죽이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압니다. 하느님은 죽은 그분을 당신의 권능으로 살리시고 다시 우리 앞에 내어 놓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이끌림에 따라서 영원을 저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을 향한 꾸준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미 우리는 선택한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사도 3,19) 

본당 축제 계획

본당 축제를 계획해 봅시다. 일단 잘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배고프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잘 먹어야 하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뭔가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돼지국밥과 수육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려면 선물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거저 받는 것이어야 하고 나름 가치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받아서 오히려 쓰레기밖에 되지 않는 것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치로운 선물을 준비해야 하고 또 기왕이면 그 가치가 평소에 내 능력으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 집무실에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드릴 경품이 한가득 쌓여 있습니다. 흥겨운 것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풍악과 놀이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신나게 즐길 수 있는 한바탕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즐겁지 않으면 축제가 아닙니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분들이 한바탕 풍악을 울릴 것이고 저마다 팀을 나눠서 윷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이제 이것으로 주님의 부활 축제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1. 하느님 축제의 먹거리 하느님은 우리를 잘 먹이시려고 합니다. 당신의 곳간에는 은총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언제나 다가서면 창고가 열리고 먹거리가 넘쳐 흐릅니다. 특히 미사 중에 다가오는 말씀의 음식과 성체의 음식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배불립니다. 우리는 잘 먹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도 희망도 사랑도 성장합니다. 2. 하느님 축제의 선물 하느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 하늘 나라의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이는 현세에서 우리 스스로가 절대로 구할 수 없는 가치의 선물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고 영혼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선물입니다. 3. 하느님 축제의 기쁨과 행복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의 가장 기초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쁨과 행복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좋은 곳에 아니라면 애써 갈 필요도 없습

살아계신 분을 죽은 것 사이에서 찾지 말아라

닫힌 줄 알았던 돌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하얗고 긴 겉옷은 신앙의 상징입니다. 혼인 잔치의 예복이기도 하고 수난 자리에서 도망가던 이가 흘려버린 옷이기도 합니다.  그 젊은이가 전하는 메세지는 살아계신 분을 죽음의 장소에서 찾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분을 만나기 위해서 그분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이 닫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분을 열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할 것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보면서 문을 열어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야 했던 단 하나의 일은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매우 큰 돌이 이미 다른 힘에 의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리라 기대하는 장소에서 우리는 메신저를 만날 뿐입니다. 하지만 메신저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의 영혼은 젊습니다. 영혼의 상태는 외적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은 젊어집니다. 반면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모든 게 다 똑같다고 자포하는 사람의 영혼은 늙은 영혼입니다. 누구나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는 젊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스스로를 늙은이로 규정하는 교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계신 분은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살아계시는 분은 이 곳에 계시다가 저 곳에 계실 수 있는 분입니다. 죽은 사람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리 저리 옮겨다니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앙은 자칫하면 죽은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예수님을 다채로운 환경에서 마주합니다. 하지만 죽어있는 신앙은 언제나 습관처럼 하는 일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시는 분이시기에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다가 또 저곳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전해주는 메신저의 목소리, 즉 젊은 영혼을 지닌 이의 목소리에

파스카 만찬 해설

희생양 우리의 죄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 죄를 대신 짊어질 때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져 주신다는 단순한 믿음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먹는 양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허락된 양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은총도 마찬가지이니 저마다 허락된 수준의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성체를 모셔도 누군가에게는 죽기 직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모시는 성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그냥 흘려버리는 은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은총이 온다고 모두 선물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릇에 알맞게 주어집니다.  피와 두 문설주와 상인방 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은 죽어야 하고 오늘날의 희생양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세상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는 가로대와 세로대에 발라집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삶에 십자가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밤에 먹다 밤은 빛이 꺼진 시간을 말합니다. 배가 부를 때 밥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 밥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린양은 이 은총의 빛이 꺼진 듯한 현세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밤이라는 시련의 시간 속에 성체라는 어린양을 먹음으로서 힘을 얻어 살아갑니다. 불, 누룩 없는 빵, 쓴나물 불은 뜨거운 열정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열정에 상응하는 뜨거운 시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지독한 수난을 거쳐서 가장 찬란한 영광을 입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허영이 없는 영혼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에 사실 누룩을 부풀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부풀리는 것은 여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룩 없는 빵은 우리의 생의 시간이 사실 얼마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계획을 여전히 세우지만 하느님은 뜻하지 않은 시간에 우리의

저는 아니겠지요?

행동이 있기 전에 생각이 먼저 있듯이 물리적인 실천이 있기 이전에 영적인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 눈 앞에 뚜렷이 존재하는 것처럼 영적인 것들 또한 분명한 현실입니다. 세상에 '균형'이 있다면 영혼에도 '균형'이 있고 오히려 세상보다 더 참된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세상에는 쓰레기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무 짝에도 소용 없고 버려져야 하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그 쓰레기를 치우는 이가 존재합니다. 쓰레기는 가만히 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수고하여 치워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죄는 어둠이고 하느님의 빛을 가리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악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악은 다시 주변에 어둠을 흩뿌립니다. 마치 술이라는 악습에 가장이 무너지고 나면 그 가족들이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하나의 악은 주변에 크나큰 고통의 결과를 야기시킵니다. 누군가에 대해 무심코 한 험담이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키거나 별 뜻 없이 한 거짓말이 누군가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온전하던 유리컵을 바닥에 냅다 던지면 수많은 파편들로 나뉘어지고 그것을 치우느라 훨씬 더 많은 애가 쓰이는 것처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파괴적인 현실은 수많은 어둠과 실재적인 아픔을 양산해 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들면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그 자유를 당신 뜻대로만 사용하지 않을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를 치우셔야 했습니다. 나아가 훗날에 당신이 완성할 세상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악이 더는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을 위해서는 그저 있는 악을 쓸어담는 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일을 하는 데에는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은 악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의 악을 쓸어담는 진공 청소기 같은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는 이

두 목숨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12,25) 우리가 영원을 살지 못하는 이상 영원한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도리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아야 그것이 증명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양자의 여정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현세의 삶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현세의 삶을 최대한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 충만의 뜻은 저마다 정하게 됩니다. 어차피 영원을 설정한 분이 없고 저마다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충만한 삶, 행복한 삶이 돈을 잔뜩 벌고 잔뜩 쓰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마다가 설정한 신념과 가치관 속에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 자체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들의 마지막 운명은 모두 '허무'로 돌아가게 됩니다. 반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도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그분이 우리에게 길이라고 보여주시는 것을 믿고 따릅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 개개인이 욕구하고 원하는 것과 상반될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우리에게 영원 속에서 갚아 주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생을 살아갑니다. 흔히 신앙을 가지면 마치 현세에서 도태되는 듯이 생각하지만 참된 신앙을 지닌 이는 거꾸로 가장 적극적으로 지상의 삶을 충실히 살아갑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생을 하찮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라 밀알 하나치의 생명력에 집중하지 말고 그보다 큰 뜻에 우리를 내어 맡기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봉헌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이치 속에서 우리의 헌신이 열매

고난을 통한 순종

많은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제 뜻대로 되는 세상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들의 기반에는 내가 욕구하는 것이 펼쳐지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돈을 벌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기 위한 미래의 요소까지 고려해서 돈을 벌고자 합니다. 힘든 공부를 하는 것도 힘든 노동을 하는 것도 모두 나중에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이루기 위해서 현재를 투자하는 셈입니다. 특히나 현대의 한국은 개개인의 자아실현, 욕구실현이 이상이 된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 많은 것들이 개개인이 더 편하고 쉽게 느끼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 '종교'라는 것은 사실 그 근본 안에 전혀 다른 방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자'에 대한 순종이라는 가치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절대자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됩니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가 더 늘어갈수록 힘든 가치가 됩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곧 우리의 뜻을 더욱 편하게 이루어주는 데에 도움이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에 일부러 타자의 뜻을 찾아서 고생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 우리 신앙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분은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세상을 제 뜻대로 휘두를 수 있었지만 '순종'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자진해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가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타인의 뜻에 나를 굽혀야 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에 많은 힘든 일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힘든 일은 내가 욕구하는 것을 굽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순종이라는 가치는 고난을 통해서만 그 실제를 알아볼 수 있고 키워 나갈

가슴에 법을 새기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 31,33) 성경에서는 사람들을 칭하는 표현으로 군중과 제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중은 그야말로 갈대와 같은 존재들이라서 바람 부는 대로 휘청거리는 존재입니다. 반면 제자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쓰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는 지금은 부족하지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여정을 따라서 걷고자 노력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신앙이 편안하다면 군중입니다. 군중은 편안함에 따라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더 쉽고 편하게 느끼는 것을 따라 살아가다보니 예수님이 치유를 할 때에는 좋다고 난리를 치다가 훗날 필요가 없어지게 되니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제 좋은 신앙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 신앙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되곤 합니다. 반면 제자는 불편함을 익숙하게 만드는 이들입니다. 학교에 처음 들어가면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들고 다녀야 하는 책가방도 무겁고 정해진 시간을 지켜 수업을 듣는 것도 힘듭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훈련'이 되어서 나중에는 그런 힘든 일들을 익숙하게 처리합니다. 신앙은 외적인 요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규정들을 배우고 교리내용들을 익힙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국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질서를 새겨넣기 위한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주일에 성당에 가는 것이 싫지만 그것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하다보면 어느샌가 미사에 맛을 들이게 되고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러 가지 않으면 내 마음이 불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하느님의 법이 새겨지고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법이 새겨지게 되면 우리는 훌륭한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반면 겉으로는 아무리 규정을 따르고자 애쓰지만 결국 마음 속에 하느님의 법을 새기기를 실패하면 결국 우리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

눈을 멀게 하다

우리의 육체의 눈은 눈 앞에 무언가를 물리적으로 두면서 가로막히게 됩니다. 그것이 눈을 멀게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주변의 빛을 모두 꺼버려도 눈은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빛을 감각하는 기관이니 빛이 없으면 소용없는 기관이 됩니다. 영혼에도 눈이 있습니다. 영혼은 욕구를 뿜어내고 그것이 가 닿는 것을 감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선에 영향을 받을 때에는 선을 바라보게 되고 악에 영향을 받을 때에는 선에 눈이 멀어 버리게 됩니다. 순진한 아이는 엄마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엄마의 냄새와 엄마의 발자국 소리도 압니다. 하지만 아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렇게나 좋아하던 엄마가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고 꺼려하게 됩니다. 가끔 아이들이 똥을 싸면 그 전까지 활발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무언가 얼어붙어 있는 모양새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죄를 저지른 영혼은 선에 대해서 눈멀게 되고 선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이 영혼의 눈을 막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성당을 나오지 않는다고 세속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의 귀한 시간을 미사를 나오지 않고 홀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테니 세속적으로는 더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영혼에서 발생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서 멀어질 때에 영혼의 빛이 꺼져가게 되고 결국 어둠에 물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억지로 보는 고해 성사라도 성사 가까이 머물러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멀리할 때에 영혼은 점점 더 어둠에 물들어가게 되고 전에는 생각지 않았던 어둠의 행실들을 쉽게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영혼의 빛을 꺼뜨려서 영혼을 눈멀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재앙을 막다

 모세가 주 그의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탈출 32,11) 모세는 단순히 애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마음에 둔 것을 실행하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애원이 하느님의 재앙을 되돌리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해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로 전능함은 흔히 '완벽함' 또는 '빈틈없음'으로 이해되고 그러자면 그 어떤 흠결도 없어야 하고 복지부동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 이성의 사고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비추어집니다. 그래서 흔히 무신론자들은 세상의 이런 여러가지 오류 때문에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전능성과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합니다. '죽어있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 완전한 법입니다. 그 생명력과 활기 속에서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또한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당신은 창조하는 하느님이시고 그 창조를 생생히 관장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이 완벽 그 자체이고 절대로 변함없음이라면 우리가 지금 존재해서 하느님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 살아있음 속에서 당신의 완전을 실행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가시세계는 무에서 창조되었고 종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영원의 여정 속에서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세상에 '질서'를 세우셨고 '정의와 공정'에 따라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비'를 가지고 있고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여기서 여러가지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마치 젠가라는 놀이처럼 나무토막 몇 개

위로 올라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요한 5,24) 떠오르는 풍선은 떠오릅니다. 떠오름이 내재적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묶어둔 줄이 있으면 멈추겠지만 줄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떠오릅니다. 그것이 그 풍선 안에 잠재된 힘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믿는 이는 떠오릅니다. 그가 지닌 참된 믿음이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고 들어높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라는 줄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멈추어 있겠지만 해방되는 순간부터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그 영혼에 잠재된 힘입니다. 무거운 돌은 아래로 떨어집니다. 중력은 돌과 땅 사이에서 돌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속성에 묶여 있는 영혼은 날아오르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것도 아래로 당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아래로 떨어질 운명의 것들에게 은총을 쏟아부어 위로 떠오르게 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라서 위에서 보고 듣고 배우신 것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의 모든 거룩한 지식은 위로 떠오르는 데에 사용됩니다. 

죄의 결과인 병도 있다

모든 병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인 병세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죄로 인해서 병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이는 이가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이는 이 사람이 겪고 있는 나쁜 일이 그의 이전의 죄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꼬인 내면은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간단한 질문에 그는 단순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37) 예수님은 그런 그의 말을 뒤로 하고 그를 고쳐줍니다. 이로써 아름다운 하나의 치유가 완료되나 싶지만 사실 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안식일의 철두철미한 준수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몰려와 그 병이 나은 이에게 안식일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그에게 '들 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치 이런 사건을 예견이라도 하셨다는 듯이 '몰래' 자리를 뜨셨고 그는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서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여기서도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로 부터 큰 선물을 받게 될 때에 그 감사함에 그 사람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싶어하게 마련인데 이 사람은 38년을 누워 있다가 일어났으면서 자신을 낫게 해 준 사람에 대해서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도 이 환자의 내면의 자기중심성을 알게 해 줍니다. 시간이 흐르고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어 충고를 해 줍니다. 그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미 시간이 흘러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음에도 유다인들에게 돌아가 자신을 건강하게 만든 사람을

심판을 피하는 법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것이 모든 일을 끝내고 결산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즉, 미사 3번에 악행 2회면 3-2=1이라는 결론이 되는 식이지요. 하지만 이는 그릇된 이해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그의 내면에서 비롯하고 우리가 가진 의도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의도가 하느님 앞에는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는다고 할 때에 믿는다는 표현은 조금은 무게감이 있습니다. 그냥 성당을 다닌다고 믿게 되는 것이나 세례를 받았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말, 믿는다는 표현은 그 대상을 진정으로 따른다는 것을 밑바탕에 두는 표현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신뢰하는 대상에게 전적으로 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세상에 더 기대고 있는 사람에게 '믿음'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런 이들을 '위선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런 참된 의미의 믿음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심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도록 그들은 심판이라는 것과는 상관 없게 됩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급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깊이 만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이 막대해지는 법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를 살아가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대는 것의 한계점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선을 열고 살아가면 이 세상에 기대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고 자신의 목숨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심판이 됩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빼앗기는 이의 마음 속에는 울분

우리가 창조된 목적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에페 2,10)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핸들을 삐끗했을 때에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지고 죽게 됩니다. 하지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핸들을 원상태로 복구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 죄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갑니다. 그냥 단순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하지만 영혼의 운전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그릇된 핸들을 바로잡아 주시면 어딘가에 가서 부딪히기 전에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만들어 두신 고속도로는 정상대로만 운행하면 목적지에 가 닿게 되는데 그 목적지는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영원한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준비할 수 없는 수많은 은총의 상급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하느님의 선을 바탕으로 창조된 곳이기에 모든 선한 가치들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는 내가 깐 게 아니고 우리가 가는 목적지도 내가 만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그저 핸들만 잘 잡고 방향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며 우리가 창조된 목적은 선행, 즉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좋은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즉 말씀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선행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 선행을 미리 준비하셔서 우리가 그 선행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초대해 주십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단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그분의 이끄심을 놓치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면 됩니다.

구제할 길이 없기 전에...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2역대 36,16) 냄비에 국을 넣고 끓이면 물이 끓기 시작할때 일정 수준 이상까지는 뚜껑이 버텨줍니다. 하지만 한계점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뚜껑을 밀어올리고 국물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진노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삶의 단편들 가운데 몇몇은 하느님이 정한 임계점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 두 번 술을 마신다고 몸이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신체의 해독 작용을 넘어서서 꾸준히 몸에 술을 부어댄다면 필히 몸은 고장나고 맙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와 비슷합니다. 한두번 원하는 게 있어 그것을 샀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탐욕이라는 영혼의 병에 시달리게 되면 훗날에는 필히 그것으로 인해서 더 큰 고통이 야기되는 법입니다. 한 인간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게 공동체도 비슷한 운명을 겪습니다. 그 어떤 공동체라도 문제가 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동체 전체가 순식간에 위태로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가 병들어간다면 훗날에는 그 결과가 공동체를 향해서 다가오게 됩니다. 인류는 지금 우리가 꾸준히 저질러 온 자연파괴의 결과에 직면해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해 인구 소멸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도 교구별로 본당별로 여러 각종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해결책들이 제시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는 참된 가치를 찾고 있으며 가장 선하신 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요? 고통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그제서야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음을 뒤늦게 이해하게 되지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 임계점에 가 닿기 전에 되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고통이 시작되고 나면 겪어야만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

얻기 힘든 진실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예레 7,28) '사람은 쉬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사실도 있습니다.'운동을 통해서 사람은 보람을 누릴 수 있다.' 쉬는 것은 누구나 쉽게 증명해 낼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운동을 통해서 보람을 얻는 것은 실제로 그 운동에 참여해서 꾸준히 그것을 실행해 나가는 사람이 마침내 얻게 될 진실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가볍게 얻어낼 수 있는 요소들이 있는가 하면 힘겹게 얻어지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요소들은 사실 후자에 속합니다. 신앙의 보람은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 뒤를 따라가야 비로소 알게 되는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쉬는 것을 좋아하는 이에게 운동을 하라고 하면 그게 너무나 싫은 것처럼 신앙의 요소들도 세상의 쾌락이라는 것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꺼려지고 싫은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분의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진실'이 사라지고 끊기게 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진실은 꾸준하고 성실하게 그 여정을 걸어나갈 때에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실에서 멀어진 이들은 가볍디 가벼운 것들로 자신을 채워 나가게 됩니다. 그저 흥미 위주의 말이나 하고 사람들의 환심이나 사려고 합니다. 그런 여정을 계속하다보면 진정 가르쳐야 하는 진실을 외면하게 되고 거짓 예언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우리가 아는 진리를 향해서 성실히 걸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되고 우리가 하는 말 속에도 진실이 더해지게 됩니다.

결벽과 완성

결벽증에 걸린 사람과 평범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책상 청소를 시켜 봅시다. 결벽증에 걸린 사람은 구석에 생겨난 책상의 흠집을 메우기 위해서 씻고 닦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칠을 새로 하겠다며 새로 페인트를 주문하고 칠하는 데에 필요한 에어 브러시와 컴프레서를 사느라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반면 다른 이는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바로 시작합니다. '완성'이라는 말은 결벽증적인 완벽과는 다른 말입니다. 완성은 본래의 목적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야로 율법과 현대의 교리체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느냐 빠지느냐? 이를 결벽증적으로 집착하면 다름과 같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언제까지 오면 유효한 미사인가? 언제 나가는 것이 허용되는가? 미사에서 동작 가운데 이런 저런 것을 빠뜨리면 미사는 유효한가? 미사보를 안써도 되는가? 써야만 하는가? 하지만 완성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보다 심층적인 차원을 살펴보게 됩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 내가 미사에 나오는 행위는 그 사랑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신심이 깊은 할머니가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미사를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할머니는 주일 미사에 빠진 대죄를 저지른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든 나으면 하느님에게 감사 드리기 위해서, 아니 하느님이 보고 싶어서 미사에 나오실 것입니다. 반대로 집이 성당 코앞인데 빈둥거리다가 미사에 조금 늦었다면 어느 시점을 바탕으로 미사는 유효하다는 규정을 근거로 이 사람은 미사에 늦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사람은 미사에 오기 전부터 미사에 늦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은 숨어 있는 것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율법은 '완성'될 것입니다. 어떤 음식은 먹어라 먹지 말아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사람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을 떠올리면서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의와 자비라는 것으로 한편으로 하느님은 정의로워야 한다면서 세상에 불의가 심판받지 않고 남아있는 모습을 두고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자비로워야 한다면서 왜 지옥이라는 것이 있는지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마지막 궁극의 정의를 바탕으로 자비를 실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낱낱이 실행될 것입니다. 이는 법원이 낮은 단계부터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처럼 하느님은 모든 정의의 가장 최상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고 가리워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최종적으로 하느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정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를 초대하는 하늘 나라에는 악의 자리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비로우십니다. 당신의 마지막 정의를 실행하기 전까지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래야 죄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죄를 짓는 순간마다 심판이 이루어진다면 죄인들에게는 기회가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은 이 지상의 짧은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자비로우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부당해 보일 정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가운데 모든 정의가 실행되기를 바라지만 하느님은 영원 안에서 마지막 정돈을 할 수 있으시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보여지는 많은 것들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자비를 실행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서는 전혀 서두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초반에 너그럽디 너그러운 임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 탈렌트는 어마어마한 돈이라고 보면 됩니다. 임금은 그저 ‘참아달라 갚겠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빚을 없애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그럽기만 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탕감받은 종의 행실을 알게 된 주인은 그를 불러들여 그가 진 빚을 다 갚게 합

걸림돌과 어리석음

신앙인들은 세상을 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잘 알면서 신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음이 좋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동으로 교육되는 것입니다. 맛있는 사탕이 좋고, 값비싼 장난감이 좋고, 1등하는 것이 좋은 법입니다. 다만 신앙인은 다른 가치관에 눈뜬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새롭게 배운 가치관과 비교해서 이전의 좋음들을 비교할 줄 아는 이들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신앙은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입니다. 자신이 이미 무언가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신앙은 우리가 생각만큼 가지지 않았음을 드러내기에 우리는 걸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 자신의 합리성에 비추어 신앙을 바라보려는 사람들에게 신앙인들이 하는 행동은 너무나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 가운데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멍청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입니다. 의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악인을 살리겠다고 나서다니요. 그러니 교만과 세속성에 물든 이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세계관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서 그 안에 조금씩 젖어들어가는 이들에게 신앙은 정반대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신앙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사로잡혀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있음을 잘 드러내어 주고 그분에게 진정한 힘이 있음을 알려 주어 그분의 힘에 의지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힘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어 줍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장 강력한 선택이 됩니다. 또한 신앙은 현세에 사로잡힌 시선에서 벗어나 영원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영원을 바탕으로 오히려 현세를 더욱 현명하게 살게 도와줍니다. 사실 멀리 내다보는 이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원 안에 시선을 두면서 현세를 살아가는 이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

하느님의 갚음과 하느님의 자애

하느님의 갚음은 삼 대 사 대라고 표현됩니다. 참으로 애매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삼 대면 삼 대고 사 대면 사 대이지 왜 삼 대 사 대라고 표현할까요? 그것은 죄의 주체가 되는 이가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후손들에게서 겪는 고통의 시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그는 자기 자신과 자녀들, 그리고 손주들, 그리고 가능하다면 증손주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의 죄의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고통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의 영향력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가 집에 불을 지르면 그것은 나의 죄이지만 불탄 집에 살아야 하는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죄지은 자의 몫이지만 죄의 결과는 다른 이들에게 필히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지금의 기후재앙은 우리 선대의 죄악의 결과이며 또한 우리의 후대는 지금의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로 고통당하게 됩니다. 혹자는 하느님이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죄 지은 사람 선에서 그쳐야 할 것은 왜 후대에게 영향을 주게 방치하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부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자애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미치기 때문입니다. 악의 결과가 주변에 영향을 미치듯이 선의 결과도 주변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선한 일들은 좋은 결과를 통해서 주변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성인이 적은 영적인 글은 길이길이 남겨져서 그 책을 읽는 모든 이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예언자가 실천한 삶의 흔적은 길이길이 표양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훌륭한 덕행의 모범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혜택이 돌아올 때에는 그것을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신앙의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부당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공로는 그들에게서 끝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 공로가 이어오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득이 되는 것이니 더

포도 철은 언제인가?

포도 철은 하느님께서 정하시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는 아무때나 수확 하지는 않습니다. 익어갈 때 수확을 합니다. 그래서 포도가 익는다는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기다리는 포도는 영혼의 포도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에 향긋한 과육이 가득할 때, 즉 여러가지 영적 가치가 들어차 있을 때에 추수의 시기가 다가오는 법입니다. 그 가치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세 가지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적 가치들이 가득찬 사람은 십자가의 친구로 살아갑니다. 그는 부활을 기다리면서 일상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포도가 썩어도 농부는 일찌감치 거두어 들입니다. 영혼은 언제 썩어들어가기 시작할까요? 그것은 그릇된 가치들이 가득할 때입니다. 영혼에 누룩이 끼인다고 표현해도 되고 세속성이 가득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껍질은 멀쩡한데 속부터 썩는 과일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외적 틀은 유지되고 있으나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어 가는 이도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바로 이런 케이스입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외적 신앙 생활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는 '소출'은 없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향기로이 드려질 진정한 결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는 화가 납니다. 사실 누군가 반응하는 것은 무언가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쥐고 제멋대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싶어했고 하느님의 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했지만 그들은 더욱 더 강한 조건으로 더욱 더 강한 율법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어 그들이 원하는 것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을 것이고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포도 철에 수확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소출을 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내

걱정 없는 삶

"신부님 걱정 없이 살려면 우짜마 됩니까?" 본당 신자분이 한탄하듯 하신 질문입니다. 답변을 드렸습니다. "어떤 걱정이냐에 달렸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걱정이냐에 달렸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그날 그날의 염려를 실제로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 하에 있는 일들이고 우리가 마땅히 신경써야 하는 일입니다. 사제가 신자들을 돌보는 일이나 아버지가 자녀들을 돌보는 일은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끌어안고 고심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있는 걱정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안에서 살아가게 되고 그분의 은총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사라지는 걱정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원'에 대한 걱정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에서 해방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자기 홀로 준비해야 하고 그런 가운데 큰 실패를 하는 사람이 겪게 되는 좌절이 있다면, 언제나 든든히 뒤를 봐 주는 부모님이 계신 가운데 이런 저런 시도들을 실패하는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언제라도 마지막 목적지를 뚜렷이 가지고 있는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나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 자기 홀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극도의 신경질적인 경계심 속에서 살아가야 하겠지요. 사실 하느님과의 유대관계가 없는 사람은 영혼이 메마른 사람입니다. 영원하신 분과의 친교가 없기에 그는 애써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하지만 결국 체험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는 체험 뿐입니다. 반면 하느님에게 신뢰를 두는 사람은 온 세상이 자신을 배신해도 최후의 신뢰처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내가 마시려는 잔

누구든 바람직한 뜻을 품고 자신이 하려는 일을 할 때 모든 것이 그 일을 도와 순풍이 불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신이 가려는 여정에 반하는 힘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영적인 여정도 마찬가지라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마냥 순탄하고 좋기만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분별하면서 그것이 당장 나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피상적인 면을 살펴봅니다. 예를 들어 사제직이라는 것을 바라볼 때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처음부터 파악해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좀 있어 보인다던지 신부님이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다던지 하는 식의 관찰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막상 사제가 되고 나면 '이런 일도 겪어야 하나' 싶은 여러가지 현실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루 하루 스스로 결정해 나가야 하는 삶이 죽는 날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오늘 1독서에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겪는 고충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예언자였고 말씀을 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도리어 그런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공격하여 명예를 실추시키고 실질적인 손해를 야기시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정작 예레미야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복을 빌어 주고 하느님의 분노를 돌리고자 애를 씁니다. 화답송 안에서도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답송의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방에 둘러싸여 자신을 반대하여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모략 앞에 놓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미숙한 이해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뭔가 좋은 것이 있으리라는 단순한 생각 속에 그 아들에게 영광된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마실 잔의 성격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첫째가는 자리에 머무르는 지배하는 왕이

악행을 멈춰라

좋다고 느끼는 것과 좋은 것, 싫다고 느끼는 것과 싫은 것은 사실 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예를 들어 볼까요? 정의는 정의가 없어서 시달린 이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정의롭지 않게 자신의 이득을 추구해 온 사람에게는 두렵고 꺼려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가치들이 비슷합니다. 좋은 것이 모두 좋게 느껴지는 법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그릇되이 실행하고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로 인해서 진정으로 좋은 것은 우리에게 힘겹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순이 싫은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사순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싫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세속의 삶에 익숙해져 있는 가운데 영적인 가치로 방향을 돌이키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힘겹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세속 안에서 지쳐가고 하느님의 손길이 아쉬웠던 이들에게 이 사순이라는 시기는 훌륭한 영적 피정의 시기가 됩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악한 행실'을 치워 버리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치워내야 할 악한 행실을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것을 오히려 악한 것으로 분류해서 우리에게서 치워 버리려고 시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의 예를 듭니다. 진정으로 거룩해지는 것과 사람들 앞에 거룩해 보이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해지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거룩해 보이기 위해서 애써서는 안됩니다. 참된 거룩함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뜻하는 바를 알아서 그것을 스스로 구체적인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거룩한 이는 주변에서 다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속에 하느님의 향기가 풍겨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룩해 보이기만 하는 사람은 위선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선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자신이 세속적으로 추구하던 것들을 더 쉽게 얻을 수 있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모르는 사람 두 사람이 모인다고 앎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것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우리의 지혜를 통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찾아나갈 수 있고 새로운 지식을 축적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식은 영적인 분에게서 답을 구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여러가지가 공존합니다. 인간적 영역과 신적인 영역이 함께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영역은 우리 상호간의 노력으로 키워나갈 수 있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역사를 거쳐오면서 교회 안의 많은 것들이 발달해 왔습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지내는 건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시작부터 우리가 지닌 여러가지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시대를 통해서 서서히 형성시켜 온 것이고 또 앞으로도 변화되어 갈 것들입니다. 하지만 '신적인 영역'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변모와 같은 사건은 우리가 만들어 낸 무언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교를 '계시 종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체계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이신 것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요한 것을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반드시 '기도생활'이 뒤따라야 합니다. 인간적인 선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하느님과의 유대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활동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초월성을 근간으로 합니다. 기도는 인간적인 이유로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것들은 인간들의 수준에서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지닌 초월성을 바탕으로 하고 하느님과의 유대관계를 맺도록 돕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염경, 묵상, 관상 등등 여러가지 종류의 기도가 존재합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우리는 물건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100만원짜리 물건을 팔고 있는데 50만원을 들고 가면 절대로 그 물건을 살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반대로 1000만원, 아니 1억원이 있으면 100만원짜리 물건은 쉽게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능력있고 고귀하고 값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덜한 것을 성취하고 해결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영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내와 겸손과 온유와 자비와 같은 내적 역량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용서하지도 못하고 쉽게 뉘우치지도 못하며 용기있게 나서지도 못하고 인내로이 견딜 줄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순전히 우리의 능력만으로 세상을 마주하려고 하면 불가능해지는 것이 많아집니다. 특히나 어둠의 세력은 인간을 공격해 들어옵니다. 그 어둠의 세력에는 악한 영들이 있고 그 영들에게 사로잡힌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과 마주할 때에 우리는 곧잘 맞설 힘을 상실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들의 힘은 만만치 않게 강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강하기도 합니다. 악한 이들은 더욱 의욕적으로 강하게 악을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악을 실행하는 이들이 훨씬 더 영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하고 동시에 순진한 이들은 그들 앞에서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자리가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수하게 우리의 힘만으로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편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머지 자신의 친아들 마저도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그 크신 사랑, 무한한 사랑에 의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조직 폭력배들이 자신의 배후 세력에 기대어 제멋대로 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

예, 여기 있습니다.

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앞에서 '예'라는 긍정의 응답은 순명을 의미합니다. 불러도 얼마든지 모르는 척 할 수도 있고 무턱대고 도망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청소년들에게서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라는 성소에의 부르심에 곧바로 네 하고 응답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 여기는 지금 부르심이 일어나는 자리를 말합니다. 가끔 우리는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느냐는 핀잔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정신이 지금 현재를 올바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지금의 나 자신과 나의 상태를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하며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의미하는 '여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며, '여기'야 말로 우리가 살아있고 무언가를 실행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인 지금에 충실해야 합니다. 있습니다 허영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풀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허영심에 빠진 이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그것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데 수준에도 맞지 않는 것을 취하려고 합니다. 또 자신이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없는 것 취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무언가를 할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 애써 그것을 없는 것으로 취급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솔직한 우리 스스로를 파악하고 그것을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그 봉헌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부르심에 긍정해야 하고, 그 자리와 순간에 실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그래서 사제 서품식에서 서품 후보자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에 이와 같이 응답합니다. "예,

마지막 한 닢을 갚기 전에는

오늘 복음을 순진하게 읽고는 잘못 이해하면 '싸우지 말라는 말이구나. 어떻게든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구나.'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성인들도 심지어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적대자들 박해자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헌데 당신을 원망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복음 선포하기를 멈추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들 앞에 자신이 의도하지도 않은 죄를 뉘우치며 '화를 풀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죄악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일에 헌신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는 자신 안에 그릇된 방향이 형성되어 가는 이에 대한 주의가 들어 있습니다. 나의 오류와 잘못으로 인해서 나를 향해 생겨나게 된 타인의 원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내가 나서서 그 앞에 잘못을 고백하고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릇되이 행한 데에서 형성된 원망이기에 그 실마리가 나에게 있는 것이지요. 먼저 다른 누군가의 원한을 야기시키는 나의 죄악이 멈춰야 합니다. 바보와 멍청이라는 것도 같은 노선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바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최고의회에 넘겨지지는 않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스스로를 일컬어 '바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단어를 다른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바보로 불러서 그의 명예를 침해하고 나의 악한 의도를 그에게 덮씌우려고 할 때에 '최고 의회'에 넘겨지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멍청이'라고 불러서 그가 하려는 좋은 일을 파묻어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부정적인 시야를 갖게 하려고 노력할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에제 18,25)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선을 '늘 착해 보임'과 착각을 해서 하느님이 늘 착해 보여야 하는 분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는 큰 착각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공정과 정의를 잘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으며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마치 복잡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합니다. 선을 행하는 이는 행복 안에서 살고 악을 저지르는 이는 순식간에 처단되어 사라져 버렸으면 참으로 단순하고 좋겠건만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의 이런 기대와는 달리 선을 행하는 이들이 도리어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반대로 악을 행하는 이들이 더욱 성공해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1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노선을 명백히 밝혀 줍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에제 18,26-27)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다고 하고 선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세상에는 악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선하지 않거나, 아니면 선하신데 전능하지 않아서 악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아닌가?" 우리는 완전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로서는 '완전'은 딱딱히 굳어져서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더이상은 손댈 이유가 없는 상태를 '완전'이라고 개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살아있음은 움직임을 전제로 합니다. 그

유일한 표징

  세상에는 수많은 소식,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폭발적인 정보사회에서 우리는 소식을 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정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소식들이 밍밍해 집니다. 마치 향수를 원액 그대로 사용한다면 엄청 진하고 소중하게 여겨지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물이나 알코올과 섞어 버리면 그 향이 있으나 마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고귀한 것과 하찮은 것이 구분이 잘 되었습니다. 하찮은 것은 우리가 일상의 영역에서 가볍게 다룰 수 있었고 고귀한 것은 비싼 돈을 들여야 겨우 배우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영적인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은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과거 사제직이 귀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영적인 이유보다도 배움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귀한 것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하찮게 다루어집니다. 따로 귀한 것과 하찮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넘쳐 흐르다보니 세상에서 떠도는 뜬소문이나 신앙의 진중한 가르침이나 구분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구약에 나오는 ‘요나’ 예언자의 활동은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선포했고 사람들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요나조차도 선포하기를 거부했던 메세지였지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피할 수 없는 체험(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는 체험)으로 인해서 결국 선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는 사람들에게 가 닿자 마치 촉매가 작용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니네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회개를 일으켰습니다. 헌데 요나가 외치는 것이나 오늘날 교회가 외치는 것이나 본질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는 말은 그 핵심에 있어서 ’한정된 기간이 흐르고 나면 멸망이 다가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마쳐지는 날,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멸망이 들이닥친다는 말이고 회개하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말과 의미, 그리고 의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그런 종류의 소리를 낸다면 그것을 ‘말’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땡똥띵똥 짱꽁캉’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말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말에는 의미가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은 하나의 그릇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기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릇이 조금 부족해도 그 안에 담긴 것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자신이 파견된 곳의 언어를 열심히 익히려고 하지만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말이, 언어가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말이 안되면 몸짓 발짓을 해서라도 의미를 관철시키게 됩니다. 의미 안에는 의도가 담깁니다. 같은 의미의 말이라도 의도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도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그를 칭찬할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를 은근히 비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의도를 영혼을 통해서 갖추고 있고 드러냅니다. 영혼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의도를 드러내고 영혼이 악한 사람은 악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파괴적인 사람이 있고, 반대로 겉은 거칠어도 생명을 주고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환자가 아파한다고 의사가 메스를 갖다대기를 거부한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병세가 악화되어 그를 죽여 버릴 것입니다. 그때 의사는 단호해야 하고 때로는 과감해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식별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외적으로 따뜻함을 드러내는 이들의 안에 숨겨진 것을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달콤한 껍질 속에 감춰진 독을 먹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입니다. 하느님은 악을 모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모든 말씀과 업적은 선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부드럽게 다가오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부드러움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선을 올바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굳건함과 용기, 성실함과 책임감이 오히려 더 요구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