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줄 알았던 돌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하얗고 긴 겉옷은 신앙의 상징입니다. 혼인 잔치의 예복이기도 하고 수난 자리에서 도망가던 이가 흘려버린 옷이기도 합니다.
그 젊은이가 전하는 메세지는
살아계신 분을 죽음의 장소에서 찾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분을 만나기 위해서
그분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이 닫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분을 열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할 것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보면서 문을 열어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야 했던 단 하나의 일은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매우 큰 돌이 이미 다른 힘에 의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리라 기대하는 장소에서 우리는 메신저를 만날 뿐입니다.
하지만 메신저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의 영혼은 젊습니다. 영혼의 상태는 외적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은 젊어집니다. 반면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모든 게 다 똑같다고 자포하는 사람의 영혼은 늙은 영혼입니다. 누구나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는 젊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스스로를 늙은이로 규정하는 교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계신 분은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살아계시는 분은 이 곳에 계시다가 저 곳에 계실 수 있는 분입니다. 죽은 사람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리 저리 옮겨다니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앙은 자칫하면 죽은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예수님을 다채로운 환경에서 마주합니다. 하지만 죽어있는 신앙은 언제나 습관처럼 하는 일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시는 분이시기에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다가 또 저곳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전해주는 메신저의 목소리, 즉 젊은 영혼을 지닌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디에 계실 지 이미 말씀해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레아, 즉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 고귀한 성전이 아니라 호숫가의 마을, 겸손하고 겸허한 이들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어제 계란 바구니를 들고 관공서들을 찾아 인사를 드렸습니다. 화려한 건물 속에 바삐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난 예수님은 하나로 마트 앞 벤치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 비록 계란 바구니를 전부 드릴 수는 없었지만 계란 두 개를 건넬 수 있었고 그것을 기쁘게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하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살아있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제는 더이상 예수님을 죽은 이들 사이에서 찾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축하 드립니다. 알렐루야.
댓글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와 잘못. 병고와 악습. 한없는 부족함과 나약함을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자신에게 침을 뱉고, 돌을 건지며 없애버리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병이 낫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걷게 되었으며, 눈과 입이 열렸지만.. 그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는 넘겨지는 달력 처럼 지난 일로 잊혀지는 슬픈 일을 자주 반복합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세속에서의 성취과 만족 보다는, 주님께서 나의 마음이라는 주머니에 조용히 채워 주시는 작은 기쁨들이 쌓이고 넘쳐, 그것이 참 기쁨이며, 참 행복이라는 뜨거움을 느끼며 감사의 삶이 되기를 기도 합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되살아 나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