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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을 막다




 모세가 주 그의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탈출 32,11)


모세는 단순히 애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마음에 둔 것을 실행하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애원이 하느님의 재앙을 되돌리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해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로 전능함은 흔히 '완벽함' 또는 '빈틈없음'으로 이해되고 그러자면 그 어떤 흠결도 없어야 하고 복지부동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 이성의 사고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비추어집니다. 그래서 흔히 무신론자들은 세상의 이런 여러가지 오류 때문에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전능성과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합니다. '죽어있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 완전한 법입니다. 그 생명력과 활기 속에서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또한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당신은 창조하는 하느님이시고 그 창조를 생생히 관장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이 완벽 그 자체이고 절대로 변함없음이라면 우리가 지금 존재해서 하느님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 살아있음 속에서 당신의 완전을 실행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가시세계는 무에서 창조되었고 종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영원의 여정 속에서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세상에 '질서'를 세우셨고 '정의와 공정'에 따라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비'를 가지고 있고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여기서 여러가지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마치 젠가라는 놀이처럼 나무토막 몇 개를 뺀다고 나무탑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기면 위태로워지고 결국 넘어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세상에 정해 놓으신 당신의 선이 있는데 사람들의 죄악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당신의 자비를 멈추고 정의의 심판을 가하게 됩니다. 우리 육체의 질병도 유사하니 처음에 독이 되는 음식을 먹는다고 바로 죽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해악을 가하면 결국 병이 덮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의인'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의인은 사람들 편에 서서 하느님께 간청을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거듭 이야기하지만 참된 의인은 말로만 부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나서서, 즉 자신을 바쳐서 부족한 이들, 죄인들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그 의인의 활동으로 피폐해졌던 것들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회복은 더디고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전능 안에서 그 의인의 노력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의인을 통해서 죄인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의인의 기도가 죄인들의 멸망을 막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관점으로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아드님의 공적 사명을 어머니의 간절한 청이 작용하여 가나의 첫 기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악인의 부족함을 채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활동으로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 약속한 것을 실행합니다. 그래서 의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재앙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

준 요셉님의 메시지…
풀을 뜯는 소의 형상과 영광을 맞바꾸는 어리석음.
그 어리석음과 뻣뻣함은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 마저 잊게 만듭니다.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하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넘어지는 누구라도 붙잡아주시며 모두에게 좋으신 그 분의 입에서 "이제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라는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은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내모습을 점검하고 돌아보며 그분을 의식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칭찬.인정과 같은 평가에 따라 자신이 가늠 되어지는 삶.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되어버리는 삶..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사순 시기에 많은 것을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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