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을 떠올리면서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의와 자비라는 것으로 한편으로 하느님은 정의로워야 한다면서 세상에 불의가 심판받지 않고 남아있는 모습을 두고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자비로워야 한다면서 왜 지옥이라는 것이 있는지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마지막 궁극의 정의를 바탕으로 자비를 실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낱낱이 실행될 것입니다. 이는 법원이 낮은 단계부터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처럼 하느님은 모든 정의의 가장 최상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고 가리워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최종적으로 하느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정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를 초대하는 하늘 나라에는 악의 자리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비로우십니다. 당신의 마지막 정의를 실행하기 전까지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래야 죄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죄를 짓는 순간마다 심판이 이루어진다면 죄인들에게는 기회가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은 이 지상의 짧은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자비로우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부당해 보일 정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가운데 모든 정의가 실행되기를 바라지만 하느님은 영원 안에서 마지막 정돈을 할 수 있으시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보여지는 많은 것들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자비를 실행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서는 전혀 서두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초반에 너그럽디 너그러운 임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 탈렌트는 어마어마한 돈이라고 보면 됩니다. 임금은 그저 ‘참아달라 갚겠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빚을 없애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그럽기만 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탕감받은 종의 행실을 알게 된 주인은 그를 불러들여 그가 진 빚을 다 갚게 합니다. 하느님은 부당함을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그가 빚지지 않은 것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원래 빚이 있던 것을 다 갚게 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열쇠는 악한 종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해야 할 것은 자신이 너그럽게 탕감받은 빚을 떠올리며 다른 이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이 행한 정의의 행동의 결과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뿐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빚을 지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빚을 탕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들의 빚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이 일련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보면 우리에게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대면해서 얼마나 그것을 실행하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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