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갚음은 삼 대 사 대라고 표현됩니다. 참으로 애매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삼 대면 삼 대고 사 대면 사 대이지 왜 삼 대 사 대라고 표현할까요? 그것은 죄의 주체가 되는 이가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후손들에게서 겪는 고통의 시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그는 자기 자신과 자녀들, 그리고 손주들, 그리고 가능하다면 증손주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의 죄의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고통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의 영향력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가 집에 불을 지르면 그것은 나의 죄이지만 불탄 집에 살아야 하는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죄지은 자의 몫이지만 죄의 결과는 다른 이들에게 필히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지금의 기후재앙은 우리 선대의 죄악의 결과이며 또한 우리의 후대는 지금의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로 고통당하게 됩니다.
혹자는 하느님이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죄 지은 사람 선에서 그쳐야 할 것은 왜 후대에게 영향을 주게 방치하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부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자애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미치기 때문입니다.
악의 결과가 주변에 영향을 미치듯이 선의 결과도 주변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선한 일들은 좋은 결과를 통해서 주변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성인이 적은 영적인 글은 길이길이 남겨져서 그 책을 읽는 모든 이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예언자가 실천한 삶의 흔적은 길이길이 표양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훌륭한 덕행의 모범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혜택이 돌아올 때에는 그것을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신앙의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부당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공로는 그들에게서 끝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 공로가 이어오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득이 되는 것이니 더욱 더 주어지면 좋겠지요.
우리는 여러가지 영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도 있고 또 부정적이고 나쁜 영향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의 선택을 하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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