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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3의 게시물 표시

두 노인

어르신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나 현대에는 더더욱이 어르신이 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습니다. 고민하는 일이 생겼을 때에 다가가서 문제를 논의하고 그 해결 방안을 의논할 어르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두 노인을 보여줍니다. 바로 시메온과 안나입니다. 우리는 이 두 노인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어르신의 모습을 찾아내고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시메온입니다. 성경은 그를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현존을 언급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드러내는 어르신의 모습입니다. 더는 세상의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그런 가운데 의로움을 추구하고 신앙에 충실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르신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여전히 세속성이 잔뜩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의로움 보다는 저마다의 끼리끼리 문화를 형성해서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것이 일상이고 탐욕스러우며 얼마 안되는 저마다의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죽음의 순간에 대한 직감'입니다. 사실 경건하게 사는 이들은 정상적인 삶의 순리 속에서 자신의 죽음의 순간이 다가옴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동물들도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직감하면 무리에서 떨어져서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 서서히 곡기를 끊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세속성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할 수 없고 따라서 의료 기술에 목매달아 죽은 것 같으면서도 죽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메온에게서 볼 수 있는 어른의 특징은 '영적 시야와 지혜'입니다. 시메온은 자신에게 허락된

가정의 영적 요소

바오로 사도는 가정 안에 '영혼의 바람직한 요소'들, 즉 가치와 덕목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짧은 단락 속에 정말 많은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일단 죽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관용, 용서, 사랑, 그리스도의 평화, 감사, 그리스도의 말씀, 지혜, 교육, 충고, 찬송, 순종... 정말 많은 덕목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들은 모두 같은 원천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 즉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에게 주파수를 맞추고 그분에게 방향을 맞추어 사는 사람은 이 모든 것들을 조금씩 완성시켜 나아갈 것입니다. 사실 덕의 종류는 많은 것 같아 보여도 결국 같은 빛에서 뿜어져나오는 다채로운 색상들입니다. 마치 서울을 가려는 사람이 차를 탈 수도, 기차를 탈 수도, 비행기를 탈 수도 있고 여차하면 지금부터라도 당장 걷기 시작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든 저든 모든 움직임은 서울을 가겠다는 근본 목적을 위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근본 목적지를 잃어버린 사람은 뭔가를 열심히 하더라도 길을 잃은 사람이 됩니다.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니 좋다는 것을 다 취하려고 들겠으나 그게 자신이 가는 목적지에 부합하는 것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은 채로 그때그때 좋아 보이는 것만을 잔뜩 거머쥘 뿐입니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가정'이라는 것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가정은 그 구성원 가운데 재력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힘있는 한 사람, 또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욕구를 충만히 채우기 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가정은 원래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된 공동체입니다. 즉 하느님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가정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뜻 앞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람직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느님을 상실한 가정은 언뜻 겉으로는 일치되어 있는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각자가 설정한 방향대로 찢어질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맹점이 여기

집회서의 가정 분석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자녀를 ‘축복’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훌륭하게 자라면 그것이 아버지의 영광이 된다고 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갖는 것을 권리라고 하며 그것을 하느님께서 보장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만큼 가정을 바람직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나아가 공경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죄를 용서받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 즉 어머니가 뿌듯해 할 만한 자녀로 성장해 가는 것은 훗날 하늘 나라에서 상급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가정 안에서 자녀들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분들이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해 가도록 가르칩니다.  또한 이러한 연결 고리의 확장을 가르칩니다. 즉,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바로 자신의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욕되게 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서 공경을 바라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노인에 대해서 헌신짝 취급을 하면서 자신들은 훗날 자녀에게 어떤 대접을 바라고 있을까요? 자녀들은 보고 배운 대로, 아니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실행할 뿐입니다.  나아가 주님과의 관계까지 효성을 확장합니다. 즉 아버지를 공경하면 자신의 기도가 하느님께도 받아들여집니다. 또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할 정도로 자신을 잘 가꾸어 온 이는 하느님만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생명의 선물도 받아서 장수하게 되고 나아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충실한 신앙인은 당연히 어머니의 내면을 편안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부모에 대한 공경이라는 가르침은 그가 그 공경을 받을 자격 여부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나이듬의 부족함 속에서도 잘 보살피도록 가르치고 지각을 잃어도 인내심 속에서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충실했더라면 아마 신앙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계시의 빛, 영광

우리 가톨릭 교회를 '계시종교'라고 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이 종교가 자연적인 인간의 초월적 본성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감추어진 것의 열어보임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에 없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생존이라는 기본적인 욕구와 자기 계발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공통되는 욕구입니다. 또 초월성을 지향하는 것조차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기본적인 욕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사도신경 안에서 전하는 가르침들은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것과는 사실 상관 없는 내용들입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내용들입니다. 그 가운데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의로운 이가 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 당해야 하는지, 또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인지, 이러한 내용들은 누군가 실제로 겪은 일을 올바로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의 생각 속에서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이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이 됩니다. 몰랐던 것들을 받아들이고 숙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리게 만듭니다.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단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은 누구에게나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방 민족에게는 그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하게끔 하고 또 이미 신앙의 노선 안에서 걸어가는 이들에게는 꾸준하고 충실할지 말지를 결정하게 합니다. 시메온이 봉헌된 아기를 두고 한 말 속에는 그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메온은 이를 두고 '계시의 빛'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떨까요? 그것은 코린토 1서 1장 23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에게 신앙은 그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결단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계시의 빛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아니면 단순히 어리석음으로 치부됩니다.

체험하는 신앙

신앙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닙니다. 신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신앙은 믿는 바를 체험하는 데에서 본질적인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신앙의 체험이 없는 이는 흔히 추상적 신앙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지닌 신앙은 힘이 없고 약하며 더 훌륭한 ‘체계’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세속성의 논리적 도전 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신앙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은 우리에게 자신의 체험에 대한 확신을 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신앙은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인 생명의 말씀에 대한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들이 삶 안에 녹아 있습니다. 저의 신앙은 저의 체험을 근간으로 합니다. 믿음 안에서 나를 던져보고 그 안에서  겪게 되는 구체적인 체험들은 저를 더욱 굳건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체험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같은 체험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은 어떻게 나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올바른 선포를 바탕으로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이 미사를 체험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있어서 혹자의 체험은 그저 통상적인 미사일 뿐입니다. 늘 오는 미사, 늘 있는 전례, 언제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체험이 그가 지닐 수 있는 전부입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 즉 미사의 본질에 대한 선포를 경험하게 된 이에게 오늘의 미사는 구세주와의 만남이 준비되어 있는 미사이고 신앙의 열정이 있는 사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보다 특별한 미사이며, 나아가 성령 기도회의 열성이 바탕이 되어 있고 심지어 치유 안수까지 준비되어 있는 미사가 됩니다. 이런 일련의 선포의 체험들은 통상적인 미사를 체험하는 이들과 질적으로 다른 체험을 선사합니다. 올바른 선포를 위해서는 겸허한 내면이 필요합니다. 똑같은 선포를 들어도 누군가의 내면은 저항합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컴퓨터에 숫자를 넣어서 복잡한 계산을 빠르게 해 냈다고 해서 그 컴퓨터를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원래 그렇게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초등학생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면서 성장해서 결국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대단하신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분이지만 그 총애가 성모님의 의지를 지워버린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선택하셔야 했고 하느님을, 그분의 구원을, 그로 인해서 스스로에게 다가올 수난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더 게으른 신앙인이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더 열심한 신앙인이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일에 한껏 빠져들어 지독히 세속화 되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성장하도록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모님의 ‘모범’을 가지고 있습니다. 2독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성모님은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늘 바라시던 영원의 성전을 지을 수 있게 되셨습니다. 

믿음의 순종

  우리는 신앙의 상황에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고 우리에게 그 아름다움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자유’를 선물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으로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핵심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물받은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필요한 것이 ‘믿음의 순종’입니다. 즉,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외아들이신 구원자를 믿고 우리의 현세의 삶의 방향에 얽매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잊어가고 현세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서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충분히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당신의 전능 속에서 준비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어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죄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기를 선택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자동으로 구원을 받도록 선택되어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항상 깨어있는 영혼으로 ‘믿음의 순종’을 하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에 굳게 매달려 있을 때에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때로 우리는 하느님을 너무 하찮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다윗도 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자신이 사는 향백나무 궁궐보다 더 좋은 곳을 마련하고 싶어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궤가 천막에 머무르고 있었고 다윗은 하느님이 거기 계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마어마한 착각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느낄 수 있게 당신의 계약궤를 마련하신 것이지 당신이 거기에 머무시려고 그 천막을 마련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는 마치 그곳에 하느님의 한정된 공간인듯이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곳에 머무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머무르는 곳을 마련하셨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은 우리의 시선을 물리적인 공간에서 영적인 공간으로 바꾸시려 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하지만 어디에서나 당신을 만날 수 있게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순진하게 당신을 믿는 모든 이가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무게가 모자란다고 여길 때에 언제라도 다시 되찾아 가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공소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한때는 사람들이 넘쳐나던 곳들도 때가 이르면 쓰임새가 없어지고 그 용도가 무색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건물을 유지하거나 사람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바로 거기에 영원의 본질이 숨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