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가정의 영적 요소



바오로 사도는 가정 안에 '영혼의 바람직한 요소'들, 즉 가치와 덕목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짧은 단락 속에 정말 많은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일단 죽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관용, 용서, 사랑, 그리스도의 평화, 감사, 그리스도의 말씀, 지혜, 교육, 충고, 찬송, 순종...


정말 많은 덕목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들은 모두 같은 원천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 즉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에게 주파수를 맞추고 그분에게 방향을 맞추어 사는 사람은 이 모든 것들을 조금씩 완성시켜 나아갈 것입니다. 사실 덕의 종류는 많은 것 같아 보여도 결국 같은 빛에서 뿜어져나오는 다채로운 색상들입니다.


마치 서울을 가려는 사람이 차를 탈 수도, 기차를 탈 수도, 비행기를 탈 수도 있고 여차하면 지금부터라도 당장 걷기 시작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든 저든 모든 움직임은 서울을 가겠다는 근본 목적을 위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근본 목적지를 잃어버린 사람은 뭔가를 열심히 하더라도 길을 잃은 사람이 됩니다.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니 좋다는 것을 다 취하려고 들겠으나 그게 자신이 가는 목적지에 부합하는 것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은 채로 그때그때 좋아 보이는 것만을 잔뜩 거머쥘 뿐입니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가정'이라는 것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가정은 그 구성원 가운데 재력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힘있는 한 사람, 또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욕구를 충만히 채우기 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가정은 원래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된 공동체입니다. 즉 하느님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가정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뜻 앞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람직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느님을 상실한 가정은 언뜻 겉으로는 일치되어 있는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각자가 설정한 방향대로 찢어질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맹점이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가정 안에 신앙을 챙기려는 노력이 점점 사라져 가면서 가족 구성원의 내적, 영적 해체가 일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만일 우리 몸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내가 팔을 들고자 하는데 팔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내가 무언가를 보고자 하는데 내 눈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깜짝 놀라고 즉시 의사를 찾아가서 고쳐 달라고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병증은 그렇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가정 가운데에서 한 자녀가 더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부모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영혼의 의사이신 분에게 딱히 의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병은 더욱 깊어지게 마련이고 신앙에서 멀어짐은 더욱 심각해지게 됩니다.


모든 병은 최종적으로 결과를 드러냅니다. 영혼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가정의 미래는 각자의 고유한 방향성 안에서 분리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영혼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세속의 도전은 영혼의 여러 병증을 낳게 되고 이는 결국 외적으로도 드러나게 됩니다. 아니, 이미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마다의 가정마다 어떤 말못할 사연을 품고 있는지는 사실 각자의 가정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러한 것들은 좀처럼 조사되지 않으며 결과가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혜는 그러한 일들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콜로 3,16)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