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7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진주 / 그물 / 새것과 옛 것

  얼마 전 김천 근처의 한길 가에 있는 카페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천정에 커다란 바퀴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걸 쳐다보면서 다들 이런 저런 품평을 했습니다. 헌데 처음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바라보던 바퀴가 점점 그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카페의 사장님이 텔레비전 진품명품에 감정사로 나오는 사람이고 카페의2층과 3층에 골동품이 가득하며 결정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다가와서 천정에 달린 바퀴는 외국에서 들여온것으로 적어도 100년은 족히 넘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무심코 바라보던 그 바퀴의 의미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하늘 나라는 그 가치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숨겨져 있는 이유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닫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즐겨 먹는 사탕이나 좋아하는 장난감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그러한 것들이 그닥 가치없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세상이라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현실 속에서 소중한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려 영원 안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하늘 나라라는 가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한 번 제대로 본 사람은 절대로 마음에서 그 가치를 지워낼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다 빼앗겨도 오직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치를 모르는 이라면 고귀한 진주가 뭍혀 있는 신앙생활을 가차없이 내던질 것입니다. 신앙을 껍데기만 훑고는 그 진정한 가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사를 쉽게 내던집니다. 작년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면서 초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성당은 원하는 이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몇 번의 교리를 거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식별되기 시작합니다. 처음 한 번만 나오는 사람도 있고 두어번 나오다 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뒤늦게 기회를 줘서 받아들여졌지만 교리에 자주 빠져 탈락한 사람도 있습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열린 기회가 곧 완성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선'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치고 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악인들도 선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 안에 어둠의 씨앗을 뿌렸고 사람들은 선이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을 추구하면서 자기들은 좋은 일을 한다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흔히 주변에서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이 중독된 대상, 집착하고 있는 대상을 선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알콜에 중독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스스로 알콜을 찾아서 그 취기를 누리려고 애를 씁니다. 이와 비슷하게 세상이라는 것에 중독된 사람은 세상 자체를 추구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이야말로 '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 즉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선이 무엇인지 올바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 선이신 분의 뜻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이 선이 됩니다. 그래서 그 선을 위해서는 기꺼이 주변에 존재하는 악을 견디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시련과 희생을 감내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런 악이 오히려 선을 완성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박해로 인해서 신앙의 정수가 생겨났고 그 신앙의 정수에서 지금의 신앙의 자녀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박해는 나쁜 것이지만 그 박해를 통해서 하느님은 더 큰 선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방향 없이 달려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은 뚜렷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최종적인 완성이고 선입니다. 그분의 수난을 닮고 그분의 죽음을 닮아가는 자녀들은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이용하지만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삼아 걸어갑니다. 우리에게는 그분이 가신 길이 선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 선을 올바로 분별

분별력

한 공동체를 이끌라고 할 때에 우리는 다양한 면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한 사람처럼 공동체를 간주해서 그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의 여러 단계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육체는 그 공동체가 가진 여러가지 재원들, 구조들을 말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곳에 본당을 짓는 것처럼 필요하다면 함께 모여 전례를 거행할 외적 건물을 짓기도 해야 하고 또 사람들을 모아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육체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 공동체가 할 일을 추스려야 합니다. 즉, 여러가지 구체적인 행사들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성지 순례도 가야 하고 필요하다면 구역 미사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공동체의 활성화를 꾀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영혼입니다. 즉, 공동체가 최종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올바로 설정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열왕기 상권에 따르면 바로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입니다. 이제 다시 거꾸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올바르지 않은 분별력을 가지고 행사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행사들이 공동체를 장기적으로 파괴하는 데에 일조하게 됩니다. 최종적인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은 채로 마구마구 행사를 하게 되고 또 왜 하는지 이유도 모를 활동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중구난반으로 쪼개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합니다. 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노인에게 중노동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공동체의 특성 속에서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본당에서는 이미 여러가지 지체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늘 해 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일들 속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올바른 분별력 없이 본당의 외적인 것을 추구할 때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누군가의 성과주의적인 욕심에 의해

십계명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계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그분의 위치에 다른 것을 절대로 끼워넣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흔히 가톨릭을 비판하는 이들에 의해 '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경의 표현이 '모든 하느님을 표현하는 이미지'를 금지하는 계명으로 잘못 해석되곤 합니다. 하지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가톨릭 교회는 여러가지 예술로 표현된 하느님의 거룩함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내면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흠숭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 됩니다.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철 없는 어린아이가 입이 험한 부모에게서 욕설을 주워 들어 그걸 반복한다고 그 아이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하는 말에 올바른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우리의 입술로 발음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갖는 의미와 그것을 드러내는 형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천주교 신자가 자신의 신앙의 이름에 어긋나는 행실로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 자체를 비판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야말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경우가 됩니다.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고 고해소에서 털어놓는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핵심을 많은 경우에 놓치고 있습니다. 계명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을 가장 훌륭하게 완성하는 것은 가장 거룩한 기도이자 십자가의 희생 제사인 성찬례에 함께 참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세속과 연계된 일을 쉬어야 하고 미사에 가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핵심은 '거룩함'을 완성하기 위함이지 그 행위들 자체를 율법적으로 완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생명을 다루기 위해서 교대 근무를

시련 속에서 드러나는 부르심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는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오늘과 내일 그들을 죄악에서 벗어나 성결하게, 거룩하게 하고 믿음의 옷을 더욱 깨끗이 빨아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실 때에 그분을 올바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러 간 모세와 백성 앞에는 사실상 '위기'가 닥쳐 있었습니다. 마치 시나이산은 화산 활동이 드러내는 것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었고 그것은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현세에서 그러한 종류의 두려움을 목도합니다. 우리의 일상에 다가오는 여러가지 사건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만 같습니다. 자신의 어두움을 미리 털어내고 신앙의 거룩한 옷을 준비하지 않은 이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갈구하기는 커녕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부르심은 시련이 가장 강한 그 순간에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초대는 세상의 것들을 순식간에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드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믿음으로 정돈해 가는 이들은 소소한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반면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 겨우 세례나 받아서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 이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신앙의 기초마저도 의심으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특히나 앞서 말한 두려운 사건이 다가올 때에 더욱 세상에 들러붙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셈입니다. 이런 인간의 현실 앞에 신앙은 '비유'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비유라는 것이 독특한 이유는 '알고자 하는 이에게 뜻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아침에는 양식을

사람은 무언가 자신의 내면을 채울 거리를 찾습니다. 헌데 자신이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올바로 식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 필요하다면서 '불륜'을 찾거나, '행복'이 필요하다면서 '부귀 영화'를 찾는 식입니다. 올바른 출처를 알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원하는 대상을 갈구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찾는 것은 '배고픔'이라고 하며 그것을 이집트 땅에서 채우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집트에서 고기를 배불리 먹던 그들이 도대체 지금 왜 광야에 있는 것일까요? 아무도 그들을 광야로 '억지로' 끌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택할 수 있었고 스스로 양을 잡아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고 모세의 인도를 따라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들은 원했다면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이집트에서 억압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역에 짖눌려 탄식하며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제발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구원의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먹거리' 하나에 사로잡혀 그때 당시의 괴로움은 모두 망각하고 자신들이 먹던 고기 생각만 간절한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그릇된 대상을 갈구하면서 자신을 '자유'에서 '속박'으로 밀어 넣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스스로를 해방해 줄 것으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종살이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불륜을 하면 사랑의 배고픔이 해소될까요? 당장의 쾌락은 채워질지 몰라도 결국 자신의 원래의 가정이 파괴되는 위험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새로운 괴로움을 토로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부귀 영화를 손에 쥐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일일까요? 부귀 영화의 이면에 뒤따르는 수많은 어두움들을 영혼은 올바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것을 '소유'하면 그에 상응하는 신경을

모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사제 서품을 받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물론 사제 서품을 받으려고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 서품을 받는다는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청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사제 생활이 어떠할 것인지, 어떤 역경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제직을 고수하고 성소에 매달릴 것인지를 나날이 고민해야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분명한 인식을 품고 그 선택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다가올 일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즉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무엇을 청하는지 분명히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막연히 자신들이 청하는 것이 좋은 것이리라 예상할 뿐입니다. 좋지 않은 것을 자진해서 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영광, 그들은 그것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실 몫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청을 보다 현실적이고 본질적인 청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즉, 주님이 마시려는 잔을 나누어 마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하고 응답합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그 순간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완성하겠다는 일종의 약속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도망가 버리는 약한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시고 그들을 조금씩 이끌어서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영광을 나누어 받는 자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도 비슷한 일을 겪습니다. 사실 우리가 세례때에 무엇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서는지 올바로 인지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모두 인지하고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세례가 뭔가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

예로부터 교회는 '하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는 '하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를 말한다는 것이 지상의 나라에서 완전히 마음을 떼고 무관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하느님은 시작부터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라는 '목적지'를 선물 받은 것이고 그 목적지를 바탕에 두고 지금의 현세를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뒤따르게 되는 온갖 어려움들을 갖가지 비유를 들어 잘 설명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밀과 가라지의 비유인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핵심은 우리의 자유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의지적으로 '선'을 선택하는 상태, 바로 거기에 하늘 나라의 기쁨이 놓여 있습니다. 즉 하늘 나라는 영혼의 기쁨이 가득한 곳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선을 행하는 이들이 아니라 선과 악의 자유로운 선택 가운데에서 선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의지적으로 그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달리 나쁜 일을 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이 금지된 방 안에서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칭찬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달리기를 하는 데에 자기 혼자 트랙을 달려서 질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경주를 이겼다고 그에게 상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선택지가 열려 있고 그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악의 유혹을 스스로 피하고 선을 향해 돌아서 꾸준하고 열성적으로 그 선을 완성해 나갈 때에 그가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방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잘 알고 있고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아가도록 허락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의인에게는 상급의 기회를 더 확장하는 것이고 악인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생생히 살아 있어서 지금 조금 착하다고 해서 죽는 순간까지 그것을 유지하라는 법이

대신해서 간구하다

마치 손에 물건을 쥘 수 있듯이, 또 감성에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성에 지식을 수용할 수 있듯이 우리의 영혼에는 '영적인 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은 사실 다양한데 여러가지 덕이 있을 수 있고(인내, 겸손, 온유, 친절, 선행, 선의, 호의, 진실 등) 또 정반대로 여러가지 악덕이 있을 수 있습니다(분노, 교만, 격분, 악의, 거짓 등). 또 우리 고유의 영혼이 아닌 다른 영의 영향력을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더러운 영'의 활동을 언급하고 있고 또 '성령'의 활동도 언급합니다. 사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성령을 함께 받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적 수용과 더불어(아이들은 부모나 후견인의 대리인을 통해서 그 약속을 대신 받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성령에 대해서 활짝 열린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령의 내재적 활동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성령의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바로 로마서의 언급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종종 혼동을 일으키곤 합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한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서로 반대되는 자기 인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악인은 거꾸로 스스로를 선한 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고 반대로 선한 이들은 스스로를 너무나 비천하고 모자란 악을 자꾸 저지르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는 식별을 잘 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실한 선의 방향이고 무엇이 위선인지를 잘 밝혀 주어야 합니다. 또 무엇이 정말 악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약함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잘 알려 주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쓰러지는 것이 악은 아닙니다. 그건 도와 주어야

의인의 인자 / 죄인의 회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느님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뭔가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 방치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껴지는 때가 많습니다. 의인이라고 해서 딱히 현세적 축복으로 가득 채워서 상을 주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반대로 악인이라고 해서 그때그때 벌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질 급한 이들은 이런 하느님을 두고 '계시지 않는다'라고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눈에 보이는 활동의 근거가 하나도 없어 보이니 그냥 마음 편하게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존재하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바라보지만 실제로 태양은 뜨거나 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지구가 돌고 도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 위에서 살아가지만 자전 그 자체를 딱히 느끼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은 다른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은 사실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평소에 거의 인지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돌보신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헌데 하느님은 만물의 생장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 거대한 규모를 어떻게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과학자들은 곤충 하나를 두고 평생을 연구하기도 하고 그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는데 온 세상과 우주를 돌보시는 전능성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그 거대한 능력 속에서 의인과 악인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마음이 넓은 사람을 통이 크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바다가 지상의 모든 물줄기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듯이 통이 큰 사람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경솔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넓은 마음에 담아서 묵은 김치를 숙성 시키듯이 오랜 기간 숙고합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성모님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넓은 바다의 고고하게

파스카 축제의 세부 지침에 대한 영적 해설

한 해를 시작하는 달 - 이전까지의 시간 관념에서 새로운 시간 관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가톨릭 교회에 전례력이 있고 우리에게는 대림절부터 한 해가 시작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기준이 신앙으로 인해서 거룩하게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세상의 규칙 안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영적인 규칙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웃과 함께 - 연대와 돌봄을 의미합니다. 구원에 다가오고 싶어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초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 가까이에 구원을 바라는 이가 있는데 내가 손을 내밀어주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될 때에는 우리에게도 그 책임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사람 수에 따라 /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 헛된 예식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무조건 예배를 드린다고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헛된 희생이나 과한 허례허식은 하느님께서 반기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의미한 희생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가르치십니다. 저마다 능력에 맞게끔 하느님에게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흠 없는 양이나 염소 /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피 - 피가 발린 가로대와 세로대는 십자가를 드러냅니다. 무죄한 어린양이신 구세주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내게 된다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저녁 어스름 / 그날 밤 - 성경의 빛은 영적인 지혜, 영혼의 빛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일주일간 세속을 살면 영혼의 빛이 꺼져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어두워져 갈 때에 하느님의 빛을 구해 그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운 영혼에 빛을 불어넣기 위해 파스카의 잔치를, 즉 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누룩 없는 빵 / 쓴 나물 - 누룩은 영적 교만을 의미합니다. 누룩 없는 빵은 겸허해진 우리의 정신을 뜻합니다. 쓴 나물은 신앙을 지니고 현세를 살아가는 고난,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멍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나온 이스라엘 민족처럼 일상 안에서 시련을 겪게 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이 있는 채 /

하느님의 강한 손길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탈출기 3,19-20) 신앙 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양다리를 걸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을 확고히 정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삶을 재편성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빠진 다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신앙의 여정을 걸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허울 좋은 겉꾸민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여전히 탐욕과 이기심과 분쟁과 험담을 계속하면서 성당에만 나와서 아멘 아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끊어내야 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하지만 탈출기의 말씀처럼 세상의 왕을 대변하는 이집트의 왕은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지배 아래 있기를 바라고 자신의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우리의 자유를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우리의 마지막 숨이 멈추는 그날까지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강한 힘이 그를 몰아세워야 그가 비로소 미약한 움직임이라도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본격적으로 걷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붙들려 있는 세상의 힘을 떼어내기 위한 당신의 위대한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보게 하십니다. 세상이 얼마나 부질없으며 그저 자기자신을 위해서 모으고 쌓기만 한 이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나날이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는 인생들을 눈앞에 펼치면서 우리의 생의 본질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루는 이런 이가 세상을 뜨고 또 하루는 저런 이가 세상을 뜹니다. 심지어는 우리 가까이 존재하던 이들도 데

초심자의 신앙의 단계

부르심 - 타오르는 떨기 불에 타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는 나약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고 그 열정으로도 타서 사라지지 않는 신비로움을 드러냅니다. 때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신앙의 열정을 품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 정도로 무언가를 하면 분명히 다른 이 같으면 이미 그 열정이 타서 포기해 버릴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끊임없이 신앙의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됩니다. 인간의 능력은 분명히 한계가 있고 어느 정도 소진되고 나면 없어져 버리고 말지만 하느님의 열정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타오르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현존의 표지가 됩니다. 회개 - 거룩한 곳과 신발 거룩함은 세속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속의 것을 그대로 들고 거룩함으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세속의 먼지가 잔뜩 묻은 신발이라도 벗어야 합니다. 그 상징적인 표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세상을 끊어 버리겠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회개의 표징이 되는 것이고 신발을 벗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로만 그렇게 할 뿐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배움 -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모세는 자신의 조상들이 어떤 존재인지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믿음의 삶을 거쳐왔는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배움은 예비자 교육 때에 이어 일상의 영역 속에서도 꾸준히 이어집니다. 두려움 - 얼굴을 가리다 모세는 하느님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정반대로 하느님을 무시하고 세상의 어떤 요소들을 두려워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의 힘과 권력 앞에 우리를 조심스럽게 내보이면서 정작 하느님 앞에는 기고만장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살지도 알지 못하면서 스스로 인생의 계획을 짜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뉴스를 통해서

가치를 위한 노력

마치 많은 물을 포도주에 섞으면 포도주가 희석되듯이 사람의 내면의 지혜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선조들을 '미개하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지금의 문명의 수준을 이루지 못하고 푸세식 화장실에 전기도 올바로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보다 덜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면이 '원시적이고 미개하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선조들은 오히려 현대인들이 갖지 못한 내적 가치들을 올바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웃 간에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당연했고 천지 신명에 대한 인지에서도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존재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헌데 이런 지혜로움에 세속성이라는 물이 자꾸만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들이 희석되고 또 희석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의 가치관 속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스스로 좋게 느끼는 것을 우선된 가치로 삼습니다. 헌데 문제는 사람마다 그것이 전혀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관된 가치가 존재하지 않고 저마다의 '느낌'이 주된 가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막연히 착하고는 싶은데 진정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고민해 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적어도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존재하고 그분의 거룩한 뜻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으며 그분이 세우신 교회의 가르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기초 안에서 세부적인 것들을 올바로 식별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도 썰물에 떠내려가면서 다른 이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소경은 소경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올바로 이끌고 도우려면 든든한 밑바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똑바로 서야 남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훈련도 해야 하고

두려움에서 구원으로

모세는 파라오의 양아들로 입양되지만 출신은 이집트인들이 천시하는 히브리 민족 출신입니다. 또 사람을 살해한 범죄자 이지만 민족의 구원자로 나서기도 합니다. 그의 생은 이리 저리 복잡한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생도 여러가지 굴곡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는 영혼은 결국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 우리의 삶이 어떠한 형태를 지녔던 우리가 최종적으로 하느님에게 매달릴 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올바른 길에 들어서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이 올바른 길, 구원의 길에 들어서라고 하느님은 여러가지 형태로 사람들을 부르고 초대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없게끔 하느님은 가장 위에서부터 가장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듣고 배울 수 있는 초대를 준비하셨습니다. 오죽하면 길가에 나가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시는 성경 말씀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초대는 모든 이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고을들이 주님에게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그들이 받은 어마어마한 주님의 돌봄 때문입니다. 사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은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이 선물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눈 앞에 두고 수많은 기적들을 목도하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도 일어납니다. 사실 지금만큼 신앙을 편안하게 원하는 만큼 누릴 수 있는 환경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원하면 누구나 가까이 사는 사제를 찾아볼 수 있고 성경도 구입할 수 있고 인터넷에 배움의 기회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현대의 사람들에게 내어주신 만큼 더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더 받은 고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식별력이 없습니다. 마치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왜 나를 이런 지옥같은 곳에서 태어나게 했는가 하고 불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지옥같은 나라 근처에도 가 보지 않았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면 외출

비유로 말하다

하느님은 자동 기계 장치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셨을 것이고 그리고 그런 것을 만들었다고 해서 기뻐할 이유는 딱히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자신이 지닌 그 고유한 자유 안에서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이유 안에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자유의 상태가 존재합니다. 비유는 어찌보면 본연의 뜻을 감춘 표현입니다. 본질을 바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듣는 사람이 노력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숨겨진 뜻이 담긴 시 한 편을 듣게 되면 저마다 감상이 달라집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김 동 명(1900-1968)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내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우 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물게 하오 이제 바람이 불면 나는 또 나그네와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이런 시적 표현을 들을 때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겪은 사연을 바탕으로 참 절묘하게 묘사했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못 알아듣다가 이 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 뒤늦게 '아하!' 하고 깨닫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쓰십니다. 비유는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고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에게는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그것이 이사야 예언서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

쉽지 않은 신앙생활

신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그건 사제라고 해서 더 쉬워지거나 세속을 살아가는 평신도라고 해서 더 어려워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꾸준한 신앙생활은 힘든 일입니다. 세상 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힘든 세상 일을 신앙 없는 이들이 거뜬히 해내는 이유는 세상에서 보장된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지으면 수확하는 때가 있고, 직장에서 일을 하면 그만한 돈을 벌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수고하고 그 상급을 받아 들입니다. 사실 신앙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공연히 헛된 일에 애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 결과물이 있기에 애를 씁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결과물이 우리의 죽음 이후에 주어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진위가 나뉘게 됩니다. 진짜 신앙인은 영원 안에서 주어지는 상급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고 가짜 신앙인은 현세 안에서 되돌아오게 될 상급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가짜 신앙인은 현세 안에서 돌아올 것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 가차없이 신앙을 내던져 버리고 진짜 신앙인은 현세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꾸준히 자신이 믿는 바를 지켜 나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시대라는 것은 80년대, 90년대와 같이 특정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생애 주기 전체를 통틀어 '이 시대'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 동안 겪게 될 고난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리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노년에 편하게 쉴 생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지만 나이가 들면 또 전에는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새롭게 등장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체험을 어렵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씨앗

신뢰라는 것은 우리가 생을 살아가면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가치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샀는데 그 물건이 새 물건이 아니고 하자가 있는 것이라면 그 가게의 신뢰는 바닥날 것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악인들 사이에도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신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그 신뢰는 훗날에는 반드시 무너지고 말겠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아닌 존재는 '영원'을 약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자신이 정말 신뢰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존재의 약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운동을 해서 살을 뺀다고 하고 오늘 마음이 바뀌어 간식에 손을 대는 우리 자신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른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도 분명한 한계를 지닙니다. 그는 '영원'을 살지 못하니까요. 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은 '하느님' 뿐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분 하느님 만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야말로 영원을 쥐고 계시고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예수님의 별칭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가 말하는 대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 그 몫이 주어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중심을 잃지 않고 걷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과 이성은 균형을 갖추어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뜨거운 신앙만 존재하고 이성적 사고가 마비된 것도 위험하고 반대로 냉철한 이성만 존재한 채로 신앙이 없는 것도 위험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기를 요구합니다. 세상은 영리합니다. 그리고 그 영리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악한 의도를 펼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람도 영리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현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설교를 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면 내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세상을 잘 간파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에 합당한 가르침을 선물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가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리함은 필요합니다. 세상은 언뜻 온화한 얼굴로 마치 둘도 없는 친구라는 듯이 다가와서는 등에서 칼을 꽂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의 내면에 숨은 핵심을 파악해 내야 하고 그들이 쓰는 위장 전술을 파악해 내야 합니다. 좋은 선물로 마음을 녹인 뒤에 거부할 수 없는 계략을 걸려고 작정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순박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영리함은 필요합니다. 선교지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돕다 보면 사실은 도움이 전혀 필요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서 진실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올바른 도움이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연히 우리의 선한 의지를 그릇된 곳에 쓰이게 만드는 사람들인 셈입니다. 흔히 성당에서 언뜻 자신이야말로 가장 힘든 사람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내비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식별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선한 이들의 좋은 의지를 깎아먹는 이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약한 사람은 아프다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순박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들의 사명

1) 하늘 나라의 선포 2) 앓는 이 - 영적인 악습에 신음하는 이 / 고치기 - 악습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악습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도움 3) 죽은 이 - 영혼이 죽어버려 초월적인 사고, 신앙적인 감각이 완전히 막혀 있는 사람 / 일으키기 - 드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줌 4) 나병 환자 - 증오와 원한으로 홀로 고립된 영혼, 타인과의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 이 / 깨끗하게 하기 - 그들 내면에 존재하는 증오의 뿌리를 자르기 5)마귀들 - 악을 조장하는 이들, 분열을 일으키고 분쟁을 만드는 이들 / 쫓아내기 - 선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6) 파견된 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고 그곳에 머무르기 - 평화를 받아들일 만한 사람 7) 거부당할 때에는 발의 먼지를 털기 - 영적으로 남는 미련이 없도록 정리하기 / 사도의 눈 밖에 난 고을의 영적 최후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지독함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들이 어느 지방 출신인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들이 가나안 출신이라는 것을 압니다. 요셉이 묻는 것은 보다 내밀한 영적인 의미가 담긴 질문입니다. 그건 우리가 어떤 마음의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당을 나아오는 데 있어서 다양한 출발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선물하시려는 구원을 찾아서 나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정직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일상 안에서도 그들의 신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헌신적이고 책임감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초월적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목적으로 성당에 나아오는 사람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당을 '인간적인 배경' 때문에 나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단 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 속에 하느님을 향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힘든 일이 닥쳐 오면 그들은 쉽게 신앙을 내던져 버립니다. 또 탐욕스런 목적으로 성당을 나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거철의 정치꾼들이나 다단계를 성당에서 하려는 사람들 그 밖에도 다른 여러가지 세속적 이득을 성당에서 취하려는 목적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성당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려는 사람들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지만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을 아무런 절차 없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에게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요셉의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요셉은 형제들이 악한 일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직하다면, 즉 자신의 어둠과 죄악의 행실을 뉘우치고 솔직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요셉은 기꺼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일꾼

성경은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서술합니다. 함께 그 의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다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 묶여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름이 있는 곳으로 다니셨습니다. 물론 당대에는 여행에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분은 육로로 다닐 수 있는 길을 위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신 조차도 분명한 한계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시아에 온 적도 없고 유럽에 간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수도 없이 배척을 당하시던 예수님은 결국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방의 여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그 이방 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분은 의외로 그곳에 오랜 시간을 머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지금껏 제 사제 생활 가운데 가장 오래 한 자리에 머물렀던 곳은 바로 '남미'입니다. 그곳에는 분명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실했고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느끼는 것은 무미건조함이고 미지근함입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는 이리 저리 많이도 옮겨 다녔습니다. 가는 곳마다 최선을 다했고 복음을 선포했지만 제대로 목마른 이들, 내어주는 복음의 물을 마시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저를 이끄시어 평화방송이라는 기회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정작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사실 자녀들은 매일 먹는 엄마의 밥이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것인지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혼을 해서 실력이 서투른 아내가 하는 설익은 밥을 먹을 때에 비로소 엄마의 밥의 가치를 이해하게 됩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다 예수님의 주된 일은 기적이나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기한 일을 벌

철부지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지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아침에 눈 뜨면 마을 앞 공터에 모여 매일 만나는 그 친구들 비싸고 멋진 장난감 하나 없어도  하루 종일 재미있었어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뒷산 언덕도  매일 새로운 큰 놀이터 개울에 빠져 하나뿐인 옷을 버려도 깔깔 되며 서로 웃었지  어색한 표정에 단체사진 속에는  잊지 못할 내 어린날 보물들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지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뒷산 언덕도  매일 새로운 큰 놀이터 개울에 빠져 하나뿐인 옷을 버려도 깔깔대며 서로 웃었지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지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어색한 표정의 단체사진 속에는  잊지 못할 내 어린 날 보물들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성경에서 철부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한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유아기 시절 우리들은 부모님을 무한히 신뢰합니다. 무엇을 주더라도 입을 벌리고 받아먹고 또 신체적 언어적 능력이 부족하기에 우리를 두는 대로 머물러야 하고 말하는 대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철부지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런 철부지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신앙'한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좋은 것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무엇을 주시든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이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처럼 똑똑하게 사물을 분간하지 못해서 우리가 그들 기준으로는 멍청해 보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신앙을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신앙을

성령을 따라 살아가다

차의 성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차를 관리하고 조작하는 주인도 중요합니다. 가끔 차 엔진의 오일을 단 한 번도 갈지 않아서 얼마 타지도 않았는데 결국 엔진을 망가뜨려 버리는 운전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차를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멀쩡한 차도 망가지게 하는 이들입니다. 거기에다가 술까지 진탕 마시고 운전대를 잡는 운전자라면 차가 성할 리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숨지게 하는 사고라도 내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는 차는 물론이고 자신의 안녕까지 기꺼이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훌륭한 운전자는 비록 낡은 차이지만 꾸준한 관리과 섬세한 운전으로 차의 상태를 늘 최상으로 유지하고 언제나 안전에 신경을 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떤 차를 몰더라도 같은 마음으로 차를 몰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많은 달란트를 지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영혼이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의 운전수로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을 모시기를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상태, 그 상태가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모든 것을 처리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궁극적인 완성은 우리의 죽을 몸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실 죽음이라는 최후를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이 없는 이들은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뒤쫓아오는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모으고 쌓아도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위협적인 괴물 앞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탈출구가 없는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죽음 앞에 좌절하고 허무에 빠져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를 망각하기 위해서 어딘가에 집착하고 중독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후자를 선택해서 어떻게든 자신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 수

우리에게 오실 왕

우리는   기쁨을   속일   수   없습니다 .  눈   앞에   있는   대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기뻐하는   시늉을   할   수는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환히   밝아오는   반가움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  내가   정말   기다린   대상 ,  내가   간절히   원한   것이   나에게   다가올   때에   나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  즈가르야   예언서의   시온과   예루살렘은   자신의   신랑이   되실   임금님의   도래에   진정으로   기뻐합니다 . 시온과   예루살렘이   의미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자신들 ,  즉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주님의   도래를   기뻐할까요 ?  오히려   우리는   그   날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  거듭   이야기하지만 영혼의   기쁨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  우리는   마음   간절히   바라는   것이   다가올   때에   기뻐하는   법입니다 . 그분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  그분은  ‘ 의로우신   분 ’ 으로   소개됩니다 .  우리는   흔히   환경에   휩쓸려서  ‘ 의로움 ’ 을   부르짖곤   합니다 .  이런   식입니다 .  사제가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는   하지만   내   자식이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하면   망설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부르짖는   의로움은   좋지만   정작   그   의로움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한다면   싫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  그런   가운데   우리는   정말   의로우신   분의 도래를   기다릴까요 ? 이어   그분은  ‘ 승리하신다 ’ 고   소개됩니다 .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을까요 ?  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