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쁨을 속일 수 없습니다. 눈 앞에 있는 대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기뻐하는 시늉을 할 수는 있지만마음 깊은 곳에서 환히 밝아오는 반가움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정말 기다린 대상, 내가 간절히 원한 것이 나에게 다가올 때에 나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즈가르야 예언서의 시온과 예루살렘은 자신의 신랑이 되실 임금님의 도래에 진정으로 기뻐합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이 의미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자신들, 즉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주님의 도래를 기뻐할까요? 오히려 우리는 그 날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거듭 이야기하지만영혼의 기쁨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간절히 바라는 것이 다가올 때에 기뻐하는 법입니다.
그분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우리는 흔히 환경에 휩쓸려서 ‘의로움’을 부르짖곤 합니다. 이런 식입니다. 사제가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는 하지만 내 자식이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하면 망설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부르짖는 의로움은 좋지만 정작 그 의로움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한다면 싫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정말 의로우신 분의도래를 기다릴까요?
이어 그분은 ‘승리하신다’고 소개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을까요? 내기를 거는 사람은 자신이 승리를 조금이라도 더 확신하는 데에 내기를 겁니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기대를 걸고있을까요? 아니면 세상의 힘에 더 기대를 걸까요? 이건 따로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천속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아예 담을 쌓고 지내라고 말한다고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육체의 안녕을 위해서 애써야 하며 필요한 것을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필요한 수준에서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이 자신의 목표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세속적 삶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이충돌할 때에 큰 고민 없이 신앙을 내던져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가 맺는 열매가 그의 나무를 드러내는 셈입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고 설령 세상의 것을 잃더라도 우리의근본적인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어 그분은 ‘겸손’하다고 소개되며 나아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소개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모습 그대로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 구약의 즈카르야 예언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겸손의 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 봅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겸손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고, 또 그런 지도자를 따르고 싶을까요? 아닌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권력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사소한 모임 속에서조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진정 겸손의 왕을 환영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것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뒤따라 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악한 의지를 꺾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병거와 군마와 활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정한 의미의 평화, 둘이서 싸우다 잠시 멈추는 휴식이 아니라 아예 서로 다툴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 참된 평화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만물을 당신의 그 질서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