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두려움에서 구원으로



모세는 파라오의 양아들로 입양되지만 출신은 이집트인들이 천시하는 히브리 민족 출신입니다. 또 사람을 살해한 범죄자 이지만 민족의 구원자로 나서기도 합니다. 그의 생은 이리 저리 복잡한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생도 여러가지 굴곡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는 영혼은 결국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 우리의 삶이 어떠한 형태를 지녔던 우리가 최종적으로 하느님에게 매달릴 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올바른 길에 들어서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이 올바른 길, 구원의 길에 들어서라고 하느님은 여러가지 형태로 사람들을 부르고 초대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없게끔 하느님은 가장 위에서부터 가장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듣고 배울 수 있는 초대를 준비하셨습니다. 오죽하면 길가에 나가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시는 성경 말씀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초대는 모든 이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고을들이 주님에게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그들이 받은 어마어마한 주님의 돌봄 때문입니다. 사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은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이 선물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눈 앞에 두고 수많은 기적들을 목도하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도 일어납니다. 사실 지금만큼 신앙을 편안하게 원하는 만큼 누릴 수 있는 환경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원하면 누구나 가까이 사는 사제를 찾아볼 수 있고 성경도 구입할 수 있고 인터넷에 배움의 기회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현대의 사람들에게 내어주신 만큼 더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더 받은 고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식별력이 없습니다. 마치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왜 나를 이런 지옥같은 곳에서 태어나게 했는가 하고 불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지옥같은 나라 근처에도 가 보지 않았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면 외출을 자제해야 하고, 관공서에서 일이 늦어지는 것은 일상인 나라. 가끔씩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져 몇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길가에서 파는 음식을 잘못 먹었다가 심각한 질환에 걸릴 수 있는 나라… 그러나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것에서 불평거리를 찾아낼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는 한국이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한 나라가 아니고 일상이 지옥같은 나라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같은 신음소리를 내는 본당들이 있습니다. 충분한 먹거리들이 존재하는 데도 먹지도 않으면서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는 이들이 있습니다. 원하면 배울 수 있고 원하면 거룩함을 얻어 누릴 수 있는 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배가 고프다고 징징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고을들은 저승까지 떨어질 것입니다.


카파르나움이 외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였으리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카파르나움은 굉장히 고급지고 겉꾸민 거짓 위선적 신앙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늘까지 오르리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가끔 가다가 이런 내면을 지닌 교만한 공동체와 신앙인을 마주하곤 합니다. 스스로를 칭송하며 하늘까지 드높이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하느님과 엄청 친한 듯이 주변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정반대가 될 것입니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그보다 견디기 쉬운 곳이 될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