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악의 아내가 될 사람을 구하는 사건에 있어서 그 아내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합니다.
1. 친족 출신이어야 합니다.
친족이 의미하는 바는 같은 내적 여정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신앙인과 신앙인은 서로 친족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앙인'이라는 규정은 뒤에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이방인과 신앙인은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런 사이의 혼인을 '관면'해 주지만 사실 적극적으로 권할 만한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혼인할 배우자를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든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자와 비신자 사이의 관면혼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의 신앙도 크게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다.
같은 영혼의 목적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최종적인 방향이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마지막 목적지에 대해서 혼선을 빚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식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착한 이미지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 보고자 합니다.
적지 않은 수도 공동체마다 심리가 유행이고 정치가 유행이 되었습니다. 진정 참된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보다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데에 애를 쓰는 모습이 강합니다. 신중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웰빙'이 유행했고 지금은 시대의 사조를 따라서 '환경'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착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같지만 인내가 필요하고 결과물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구원의 본질에 열중하지 못하고 금방 효과를 볼 수 있는 세상이 환영하는 여정의 옆길로 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운동'을 하러 여기 모인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위해서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교회에 모였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2.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사악이 의미하는 것은 '영혼'입니다. 우리는 본향을 떠나서 영혼을 헛된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외부의 것을 영적 영역으로 받아들여 들여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영혼을 외부로 끌어 당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영혼의 질서에 맞추어 세상 사물들을 이용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질서 속에 영혼을 우겨넣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돈을 왜 벌어야 할까요? 여기에 영혼의 기초적인 질서가 잡혀 있는 사람은 필요한 만큼 바람직한 수단으로 정당한 노동을 통해 돈을 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외부의 질서를 영혼의 질서에 맞추어 움직여가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영혼을 끄집어내는 사람의 경우에는 영혼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수단을 써서 어떻게든 재산을 증식 시키려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자신도 망가지고 주변도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앞서 말했던 '신앙인'의 참된 모습에 대한 힌트를 복음에서 얻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태오 역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 역시도 예수님에게 이끌려 와서 내면이 변하게 됩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질서로 끌어 들이려고 합니다. 그들의 질서에 따르면 유대인의 스승은 죄인들과 자리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참된 신앙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여 줍니다. 그것은 다음의 구절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느님께서 진정한 신앙 속에서 바라시는 것은 겉꾸민 위선적인 거룩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의 진실함이고 참된 신앙의 여정에 자신을 몸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참된 신앙의 여정 속에서는 의인이 초대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초대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곳에는 구원이 꽃피지 않습니다. 구세주는 구원을 선물하는 분이고 구원은 하느님 앞에 죄인들에게 선물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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