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느님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뭔가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 방치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껴지는 때가 많습니다. 의인이라고 해서 딱히 현세적 축복으로 가득 채워서 상을 주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반대로 악인이라고 해서 그때그때 벌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질 급한 이들은 이런 하느님을 두고 '계시지 않는다'라고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눈에 보이는 활동의 근거가 하나도 없어 보이니 그냥 마음 편하게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존재하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바라보지만 실제로 태양은 뜨거나 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지구가 돌고 도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 위에서 살아가지만 자전 그 자체를 딱히 느끼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은 다른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은 사실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평소에 거의 인지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돌보신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헌데 하느님은 만물의 생장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 거대한 규모를 어떻게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과학자들은 곤충 하나를 두고 평생을 연구하기도 하고 그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는데 온 세상과 우주를 돌보시는 전능성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그 거대한 능력 속에서 의인과 악인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마음이 넓은 사람을 통이 크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바다가 지상의 모든 물줄기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듯이 통이 큰 사람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경솔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넓은 마음에 담아서 묵은 김치를 숙성 시키듯이 오랜 기간 숙고합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성모님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넓은 바다의 고고하게 떠 있는 별이라고 해서 바다의 별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내면이 그렇게 넓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은 조급할 게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상급을 준비해 주시고 반대로 악인에게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두십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속이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 인간의 약함은 언제 쓰러질지 모르고 우리가 어느새 악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절실히 요구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해 보지 않는 영역의 절실함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배가 고파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픈 이의 절실함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혼도 마찬가지라서 은총이 메말라보지 않고서는 그들의 내면의 어두움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빛을 갈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꾸만 쓰러져 가는 그들의 내면을 하느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이가 스스로 원하기만 한다면 돌아올 수 있도록 당신의 자비를 한껏 펼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의로움에 몸담고 있다면 인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을 바라볼 때에 그들의 회개의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서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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