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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그물 / 새것과 옛 것

 



얼마 전 김천 근처의 한길 가에 있는 카페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천정에 커다란 바퀴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걸 쳐다보면서 다들 이런 저런 품평을 했습니다. 헌데 처음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바라보던 바퀴가 점점 그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카페의 사장님이 텔레비전 진품명품에 감정사로 나오는 사람이고 카페의2층과 3층에 골동품이 가득하며 결정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다가와서 천정에 달린 바퀴는 외국에서 들여온것으로 적어도 100년은 족히 넘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무심코 바라보던 그 바퀴의 의미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하늘 나라는 그 가치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숨겨져 있는 이유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닫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즐겨 먹는 사탕이나 좋아하는 장난감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그러한 것들이 그닥 가치없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세상이라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현실 속에서 소중한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려 영원 안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하늘 나라라는 가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한 번 제대로 본 사람은 절대로 마음에서 그 가치를 지워낼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다 빼앗겨도 오직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치를 모르는 이라면 고귀한 진주가 뭍혀 있는 신앙생활을 가차없이 내던질 것입니다. 신앙을 껍데기만 훑고는 그 진정한 가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사를 쉽게 내던집니다.


작년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면서 초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성당은 원하는 이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몇 번의 교리를 거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식별되기 시작합니다. 처음 한 번만 나오는 사람도 있고 두어번 나오다 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뒤늦게 기회를 줘서 받아들여졌지만 교리에 자주 빠져 탈락한 사람도 있습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열린 기회가 곧 완성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교리를 지도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을 만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가려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일련의 과정은 마지막에 선별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최종적인 심판은 죽음의 순간에 다가오겠지만 사실 그 선별은 우리가 스스로 준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좋은 고기는통통하게 살이 오른 고기이고 그런 고기를 던져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신앙인은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이 튼실한 사람일 것이고 지금부터 그런 삶을 성실하게 준비한다면 우리는 훗날 하늘 나라에 선별되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맙시다. 하늘나라의 초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법’을 가지고 따지고 듭니다. 법은 좋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고 아직 사리 분별을 올바로 하지 못하는 이에게 적절한 행동 지침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법이 최종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리와 법은결국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의 율법이 있지만 수십년을 어둠에 시달려온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안식은 뒤로 물러나도 됩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배가고픈 제자들을 위해서라면 안식일에라도 밀이삭을 비벼 먹을 수 있습니다. 늘상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보다 마음을 씻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길 잃은 어린 양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울타리 밖으로 위험이 가득한 계곡을 향해서 떠나기도 해야 합니다.


율법학자가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면 이 핵심 원리를 잘 이해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그는 필요에 따라 새것도 꺼내고 옛 것도 꺼내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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