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언가 자신의 내면을 채울 거리를 찾습니다. 헌데 자신이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 올바로 식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 필요하다면서 '불륜'을 찾거나, '행복'이 필요하다면서 '부귀 영화'를 찾는 식입니다. 올바른 출처를 알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원하는 대상을 갈구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찾는 것은 '배고픔'이라고 하며 그것을 이집트 땅에서 채우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집트에서 고기를 배불리 먹던 그들이 도대체 지금 왜 광야에 있는 것일까요? 아무도 그들을 광야로 '억지로' 끌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택할 수 있었고 스스로 양을 잡아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고 모세의 인도를 따라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들은 원했다면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이집트에서 억압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역에 짖눌려 탄식하며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제발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구원의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먹거리' 하나에 사로잡혀 그때 당시의 괴로움은 모두 망각하고 자신들이 먹던 고기 생각만 간절한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그릇된 대상을 갈구하면서 자신을 '자유'에서 '속박'으로 밀어 넣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스스로를 해방해 줄 것으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종살이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불륜을 하면 사랑의 배고픔이 해소될까요? 당장의 쾌락은 채워질지 몰라도 결국 자신의 원래의 가정이 파괴되는 위험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새로운 괴로움을 토로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부귀 영화를 손에 쥐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일일까요? 부귀 영화의 이면에 뒤따르는 수많은 어두움들을 영혼은 올바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것을 '소유'하면 그에 상응하는 신경을 써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만 모아 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낭비되는 일이 없습니다. 저마다 가능한 만큼, 필요한 만큼만 주어지고 쓰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님의 기도 안에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를 배불리는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에 필요한 영혼의 힘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때로는 현세적인 것이 부족해도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극복해 나가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시간대'인 저녁 어스름은 영혼의 빛이 꺼져가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에 의심이 들고 당연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 보이는 시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당연히 하느님이라는 분이 계신 듯 하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이 움직이는 모습 속에서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 하는 시기가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때가 바로 저녁 어스름의 시간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때에 우리에게 고기, 즉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수난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나아가 아침은 동이 터 오는 시기이고 밝음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서서히 파악해내고 스스로 희생을 감내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신앙의 여러가지 요소들에서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미사 전례에 참석하며 배부른 양식을 즐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충분한 양분을 주는 양식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엇나간 마음을 돌이키고 올바로 바라보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그날 그날의 양식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지 않으려 들고 듣지 않으려 하면서 고집스럽게 불신의 영역을 고수한다면 그 역시 합당한 결과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 원하는 것을 얻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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