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동체를 이끌라고 할 때에 우리는 다양한 면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한 사람처럼 공동체를 간주해서 그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의 여러 단계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육체는 그 공동체가 가진 여러가지 재원들, 구조들을 말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곳에 본당을 짓는 것처럼 필요하다면 함께 모여 전례를 거행할 외적 건물을 짓기도 해야 하고 또 사람들을 모아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육체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 공동체가 할 일을 추스려야 합니다. 즉, 여러가지 구체적인 행사들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성지 순례도 가야 하고 필요하다면 구역 미사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공동체의 활성화를 꾀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영혼입니다. 즉, 공동체가 최종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올바로 설정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열왕기 상권에 따르면 바로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입니다.
이제 다시 거꾸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올바르지 않은 분별력을 가지고 행사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행사들이 공동체를 장기적으로 파괴하는 데에 일조하게 됩니다. 최종적인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은 채로 마구마구 행사를 하게 되고 또 왜 하는지 이유도 모를 활동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중구난반으로 쪼개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합니다. 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노인에게 중노동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공동체의 특성 속에서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본당에서는 이미 여러가지 지체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늘 해 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일들 속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올바른 분별력 없이 본당의 외적인 것을 추구할 때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누군가의 성과주의적인 욕심에 의해서 필요도 없는 카페가 들어선다든지, 설립 의도가 불분명한 조직이 자꾸만 생겨나면 사람들은 이중 삼중으로 늘어가는 부담에 점점 더 신앙 생활의 본질적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냉담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목자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올바른 유대 관계 속에서 어떤 방향을 걸어가야할지 올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목적지를 올바로 정해 둔다면 가지고 있는 수단이 비행기든 기차든 차든 자전거든 꾸준하고 성실하게 간다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행기를 가지고 있으면 가장 빨리 가겠지만 가지고 있는 자동차를 비행기로 억지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문제는 하늘 나라에 도착하는 것이지 그곳을 얼마나 빨리 가는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선을 좀 더 넓혀 바라보면 교회 자체가 세상의 사목자 역할을 하는 등대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조급함을 버리고 사람들 앞에 이 길로 꾸준히 와야 한다는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이가 조금 더디게 따라온다고 조급해 할 것 없습니다. 무릇 관리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실함이기 때문입니다.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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