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중심을 잃지 않고 걷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과 이성은 균형을 갖추어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뜨거운 신앙만 존재하고 이성적 사고가 마비된 것도 위험하고 반대로 냉철한 이성만 존재한 채로 신앙이 없는 것도 위험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기를 요구합니다.


세상은 영리합니다. 그리고 그 영리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악한 의도를 펼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람도 영리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현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설교를 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면 내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세상을 잘 간파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에 합당한 가르침을 선물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가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리함은 필요합니다. 세상은 언뜻 온화한 얼굴로 마치 둘도 없는 친구라는 듯이 다가와서는 등에서 칼을 꽂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의 내면에 숨은 핵심을 파악해 내야 하고 그들이 쓰는 위장 전술을 파악해 내야 합니다. 좋은 선물로 마음을 녹인 뒤에 거부할 수 없는 계략을 걸려고 작정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순박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영리함은 필요합니다. 선교지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돕다 보면 사실은 도움이 전혀 필요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서 진실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올바른 도움이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연히 우리의 선한 의지를 그릇된 곳에 쓰이게 만드는 사람들인 셈입니다. 흔히 성당에서 언뜻 자신이야말로 가장 힘든 사람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내비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식별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선한 이들의 좋은 의지를 깎아먹는 이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약한 사람은 아프다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순박해야 합니다. 여기서 순박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 기꺼이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순박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면서 당하셨습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을 계속하면 지도자들의 반발이 클 것이고 결국 그들이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저항하지 않고 한 마리의 어린 양처럼 자신을 내어 바쳤습니다. 그분은 신앙의 순진함, 순수함을 지니고 계셨고 비둘기처럼 순박하신 분이셨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거꾸로 행동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속여 넘기려는 세상에는 순박함을, 반대로 하느님께는 뱀과 같은 영리함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는 영리함을 반대로 하느님께는 순박함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다보면 미움과 박해가 다가옵니다. 자신의 계략을 간파당한 악인만큼 사나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른 고을로 피해야 합니다. 우리의 분수에도 맞지 않는 어두움을 앞에 두고 그걸 그대로 견뎌내겠다고 하는 것은 위대한 신앙이 아니라 어리석은 식별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