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서술합니다. 함께 그 의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다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 묶여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름이 있는 곳으로 다니셨습니다. 물론 당대에는 여행에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분은 육로로 다닐 수 있는 길을 위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신 조차도 분명한 한계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시아에 온 적도 없고 유럽에 간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수도 없이 배척을 당하시던 예수님은 결국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방의 여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그 이방 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분은 의외로 그곳에 오랜 시간을 머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지금껏 제 사제 생활 가운데 가장 오래 한 자리에 머물렀던 곳은 바로 '남미'입니다. 그곳에는 분명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실했고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느끼는 것은 무미건조함이고 미지근함입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는 이리 저리 많이도 옮겨 다녔습니다. 가는 곳마다 최선을 다했고 복음을 선포했지만 제대로 목마른 이들, 내어주는 복음의 물을 마시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저를 이끄시어 평화방송이라는 기회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정작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사실 자녀들은 매일 먹는 엄마의 밥이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것인지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혼을 해서 실력이 서투른 아내가 하는 설익은 밥을 먹을 때에 비로소 엄마의 밥의 가치를 이해하게 됩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다
예수님의 주된 일은 기적이나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기한 일을 벌이는 요술쟁이나 마법사가 아니었고 또한 의사를 대체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는 복음 선포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한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배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틈만 나면 가르쳤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명이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한다면서 엉뚱한 일들에 치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외부적인 성전이 건립되면 자동으로 사람들의 신앙이 북돋아지기라도 할 듯이 사업들에 열을 올립니다. 신앙의 본질은 제외한 채로 사람들의 눈에 착해 보이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본질이 사라져 버린 겉치레의 일들이 난무하는 교회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하는 일꾼이 필요한데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일을 하는 삯꾼들이 판을 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가면을 바꾸어가며 복음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들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회당'에서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연히 이 회당이라는 곳은 오늘날의 성당을 떠올려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회당이 자동으로 말씀이 선포되고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듯이 의외로 회당 안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이 말라가기도 합니다. 회당에 다닌다고 해서 자동으로 신앙이 북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회당이 필요합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를 가르친 것도 환경을 가르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참된 가치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에 근거해서 세상의 여러가지 영역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과 세상의 가치를 전면에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을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방향입니다.
사실 한 사람에게 이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면 그는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그 하늘 나라의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하늘 나라의 기준에 맞게끔 일을 처리할 것이고 그가 사제이면 하늘 나라의 기준에 맞게끔 양들을 돌볼 것입니다. 그가 참외를 가꾸는 사람이면 마찬가지로 하늘 나라의 기준에 맞게끔 작물을 가꿀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세부적인 가르침을 만들어내고 전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한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각자의 내면에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고 구원을 열망하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다
예수님은 실제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거룩한 사제들에게는 이 능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함부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아무나 낫게 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그 회복으로 인해서 신앙 안에서 당신께로 나아오게 될 사람에게 은총이 전달됩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치유의 은총을 얻을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건 사제가 자신의 깜냥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순간에 허락하는 대상에게 이루어지는 일일 뿐입니다. 다만 사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가능성을 늘리기 위해서 자신을 도구로 쓰이도록 허락해 드리는 일 뿐입니다.
또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의 영적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병자는 외부로부터 병균이 들어서서 아프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는 '치유'가 절실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외부의 여러 요소에 의해서 병들기도 합니다. 주변 친구들과의 모임 속에서 '허영'을 담아 오기도 하고 누군가의 악한 의도가 담긴 험담 속에서 '시기'와 '원한'을 담아 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영혼 속에 영적 질병이 자리잡은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영적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고해성사입니다. 또한 사제의 영적인 축복은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더러운 영혼의 질병을 추방해 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소 구마예식인 셈입니다.
나아가 약한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의지는 선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힘이 딸리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강한 이들이 손을 잡고 일으켜 주고 부축해 주고 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실 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 사제가 존재합니다. 사제는 영적으로 하느님과의 유대 관계를 긴밀히 하여 세속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애를 쓰는 이들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 강론 역시도 그들의 손을 잡고 하느님께로 당겨주는 거룩한 활동입니다.
예수님은 일꾼이 적다고 합니다. 과연 일꾼이 적을까요? 서울 교구만 해도 900여명의 사제가 있고 대구교구는 500여명의 사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면적당 사제의 비율은 결코 무시 못할 수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 보았듯이 일꾼은 일을 하는 사람을 일꾼이라고 합니다. 참외 밭에 데려다 놓았는데 따라는 참외는 따지 않고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일꾼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앞서 서술한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점점 더 많아 지기를 기대합니다. 세상에는 목자 없이 시달리며 기가 꺾인 양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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