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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지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아침에 눈 뜨면 마을 앞 공터에 모여 매일 만나는 그 친구들 비싸고 멋진 장난감 하나 없어도  하루 종일 재미있었어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뒷산 언덕도  매일 새로운 큰 놀이터 개울에 빠져 하나뿐인 옷을 버려도 깔깔 되며 서로 웃었지  어색한 표정에 단체사진 속에는  잊지 못할 내 어린날 보물들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지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뒷산 언덕도  매일 새로운 큰 놀이터 개울에 빠져 하나뿐인 옷을 버려도 깔깔대며 서로 웃었지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지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어색한 표정의 단체사진 속에는  잊지 못할 내 어린 날 보물들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성경에서 철부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한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유아기 시절 우리들은 부모님을 무한히 신뢰합니다. 무엇을 주더라도 입을 벌리고 받아먹고 또 신체적 언어적 능력이 부족하기에 우리를 두는 대로 머물러야 하고 말하는 대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철부지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런 철부지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신앙'한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좋은 것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무엇을 주시든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이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처럼 똑똑하게 사물을 분간하지 못해서 우리가 그들 기준으로는 멍청해 보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신앙을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신앙을 일시적인 도피처로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들이 흔히 하는 말은 신앙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러 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철부지로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현실주의적인 사람이고 자신의 일상을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무지해 진다거나 현실 감각을 상실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잘 알면서 '초월'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실의 유혹을 가장 잘 알면서도 그것을 초월해 더 좋은 가치를 향해서 마음을 들어높이는 이들이 신앙입니다. 신앙인이라고 돈의 유혹이나 알코올의 유혹, 이성의 유혹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의 달콤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 철부지 같은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 구절은 세상 사람들에게도 나름 유명한 구절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가벼운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안식의 본질은 마냥 쉬게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극복하게 해서 우리에게 부담되지 않는 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군대에 처음 들어간 훈련병에게는 모든 것이 괴로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병장이 되고 나면 군대에 말뚝을 박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괴로운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생과 무거운 짐을 안식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는 모든 괴로움에서 탈출하게 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아예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을 안식은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걸으면서 누리는 쉼이 될 것입니다. 꾸준히 달려서 달리는 것이 익숙해지고 나면 체력도 증가하고 숨도 올바로 쉬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는 걷는 것이 쉬는 일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다가오는 일들을 참된 신앙 안에서 적극적으로 임하고 성실하게 극복해 나가면 훗날에는 일상의 모든 영역이 쉼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언뜻 좋은 가르침을 주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속이고 절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황금빛 미래를 얻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모은 재산이 도리어 골칫덩어리가 되고 온 마음을 다해 키운 자식이 속을 끓이게 하는 일들은 곧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에게 다가와서 당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의 십자가를 지고 신앙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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