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에 돗단배를 띄우면 그것은 낙동강 하류로 흘러갑니다. 한강에 돗단배를 띄우면 그것은 한강 하류로 흘러가지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당연한 이야기가 우리의 영성의 강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세상에 나의 인생의 배를 띄우는 사람은 그 하류로 흘러갑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에 배를 띄우게 되면 그 신앙이 이끄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갑니다. 로마서는 그 여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먼저는 죄에서 죽어야 합니다.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세상에서의 활동이 멈추게 됩니다. 그는 더이상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무언가를 사고 팔 수도 없습니다. 헌데 살아있는 사람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악한 의도를 하느님 앞에 꺼내놓고 그 일에 대해서 용서 받고 선한 의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더이상 죄와 함께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죽은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속의 욕구에 사로잡혀 있고 서로 다투고 경쟁하며 앙심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 죄가 우리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신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절실하고 그것을 올바로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 죽기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단순히 종교적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알고 이해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요하다면 나병 환자도 만져야 하고 가난한 이들과도 어울려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느 지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쳐질 것을 아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상의 어느 지점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그것을 상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경질적이고 안정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은 나날이 상실해가는 가운데 오히려 얻는 삶을 삽니다. 물잔은 비워져야 비로소 채워질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잃어야 얻고 죽어야 삽니다.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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