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많은 물을 포도주에 섞으면 포도주가 희석되듯이 사람의 내면의 지혜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선조들을 '미개하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지금의 문명의 수준을 이루지 못하고 푸세식 화장실에 전기도 올바로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보다 덜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면이 '원시적이고 미개하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선조들은 오히려 현대인들이 갖지 못한 내적 가치들을 올바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웃 간에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당연했고 천지 신명에 대한 인지에서도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존재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헌데 이런 지혜로움에 세속성이라는 물이 자꾸만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들이 희석되고 또 희석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의 가치관 속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스스로 좋게 느끼는 것을 우선된 가치로 삼습니다. 헌데 문제는 사람마다 그것이 전혀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관된 가치가 존재하지 않고 저마다의 '느낌'이 주된 가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막연히 착하고는 싶은데 진정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고민해 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적어도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존재하고 그분의 거룩한 뜻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으며 그분이 세우신 교회의 가르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기초 안에서 세부적인 것들을 올바로 식별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도 썰물에 떠내려가면서 다른 이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소경은 소경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올바로 이끌고 도우려면 든든한 밑바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똑바로 서야 남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훈련도 해야 하고 인내도 한껏 성장시켜야 합니다. 막연히 좋은 것은 없습니다. 좋은 가치는 고된 시련의 결과일 때도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움에 정진하는 노력을 쏟아야 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고귀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많은 것을 희생하기도 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런 여정에 동참할 의도 없이 마냥 편하고 좋은 가치는 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길러야 나도 시련의 시간에 걸을 수 있고 필요하면 남도 도울 수 있습니다. 헤이한 생각으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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