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만나는 데에는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오늘과 내일 그들을 죄악에서 벗어나 성결하게, 거룩하게 하고 믿음의 옷을 더욱 깨끗이 빨아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실 때에 그분을 올바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러 간 모세와 백성 앞에는 사실상 '위기'가 닥쳐 있었습니다. 마치 시나이산은 화산 활동이 드러내는 것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었고 그것은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현세에서 그러한 종류의 두려움을 목도합니다. 우리의 일상에 다가오는 여러가지 사건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만 같습니다. 자신의 어두움을 미리 털어내고 신앙의 거룩한 옷을 준비하지 않은 이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갈구하기는 커녕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부르심은 시련이 가장 강한 그 순간에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초대는 세상의 것들을 순식간에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드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믿음으로 정돈해 가는 이들은 소소한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반면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 겨우 세례나 받아서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 이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신앙의 기초마저도 의심으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특히나 앞서 말한 두려운 사건이 다가올 때에 더욱 세상에 들러붙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셈입니다.
이런 인간의 현실 앞에 신앙은 '비유'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비유라는 것이 독특한 이유는 '알고자 하는 이에게 뜻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현세의 요소가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가르침은 비유로밖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는 보고자 하고 듣고자 하는 이에게 그 비밀을 열어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시야에 사로잡혀 온통 세상 일만 걱정하는 이들에게 비유는 자신을 감추어 버립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행여 우리가 이런 예언의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현세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 이면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의 손길을 바라보는 사람이 됩시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자신을 아버지에게 기꺼이 내어 맡기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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