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그런 종류의 소리를 낸다면 그것을 ‘말’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땡똥띵똥 짱꽁캉’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말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말에는 의미가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은 하나의 그릇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기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릇이 조금 부족해도 그 안에 담긴 것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자신이 파견된 곳의 언어를 열심히 익히려고 하지만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말이, 언어가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말이 안되면 몸짓 발짓을 해서라도 의미를 관철시키게 됩니다.
의미 안에는 의도가 담깁니다. 같은 의미의 말이라도 의도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도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그를 칭찬할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를 은근히 비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의도를 영혼을 통해서 갖추고 있고 드러냅니다. 영혼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의도를 드러내고 영혼이 악한 사람은 악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파괴적인 사람이 있고, 반대로 겉은 거칠어도 생명을 주고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환자가 아파한다고 의사가 메스를 갖다대기를 거부한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병세가 악화되어 그를 죽여 버릴 것입니다. 그때 의사는 단호해야 하고 때로는 과감해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식별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외적으로 따뜻함을 드러내는 이들의 안에 숨겨진 것을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달콤한 껍질 속에 감춰진 독을 먹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입니다. 하느님은 악을 모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모든 말씀과 업적은 선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부드럽게 다가오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부드러움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선을 올바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굳건함과 용기, 성실함과 책임감이 오히려 더 요구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하느님의 말씀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할 것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실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곤경이 들이닥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이 얌전히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답송은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의인들을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세상 사람들은 헛된 말들로 자신을 꾸미려 듭니다. 그래서 기도조차도 공연히 길게 빈말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기도를 하더라도 그 안에 스며든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하느님의 의지에 우리의 의지를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안에는 사실 영성의 총화가 들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만 있어도 우리의 영적 생활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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