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는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돌보는 양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게 도와주는 것이 하나이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구약은 악성 피부병을 바탕으로 그것을 식별하고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그 부정한 이를 격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감독는 사제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피부병은 '감염성 질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모든 이가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악성 피부병은 죄를 표상합니다. 죄는 그 자국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오래도록 잔존하여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사제는 식별해야 합니다. 잠깐 유혹에 빠지는 것과 오래도록 같은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잠깐 숙취에 시달리는 것과 이미 오래도록 같은 악습에 빠져 수많은 오류를 저지르면서도 또 술을 진탕 마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그 내면의 어둠을 올바로 식별하고 그에게 뚜렷이 그것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회복도 없고 개선도 없습니다. 잘못을 모르는데 뉘우침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 사회는 이 부분에서 많은 약점을 보입니다. 현대에는 '잘못된 것'을 애써 '다른 것'으로 포장하려고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에게 충고를 해 준다는 것은 선을 넘는 일이 되었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이는 소위 꼰대가 되고 맙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탐욕은 누구나 다 추구하는 일이 되고 불륜은 로맨스가 되어 버립니다. 모든 것은 그냥 그대로 좋은 것이고 바른 길은 따로 없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구원관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천주교의 가르침도 좋은 것인 만큼 불교의 가르침도 좋은 것이고, 심지어 미디어에는 온갖 점성술과 샤머니즘이 판을 쳐도 그건 그냥 하나의 문화라고 치부하고 맙니다. 혼돈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결국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냉담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었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내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더 쉽게 하느님을 떠날 수 있게 되었고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현대의 악성 피부병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이런 상황을 더욱 직시하고 이것이 부정하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영혼의 질병에도 감염성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더욱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가진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