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순진하게 읽고는 잘못 이해하면 '싸우지 말라는 말이구나. 어떻게든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구나.'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성인들도 심지어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적대자들 박해자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헌데 당신을 원망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복음 선포하기를 멈추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들 앞에 자신이 의도하지도 않은 죄를 뉘우치며 '화를 풀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죄악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일에 헌신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는 자신 안에 그릇된 방향이 형성되어 가는 이에 대한 주의가 들어 있습니다. 나의 오류와 잘못으로 인해서 나를 향해 생겨나게 된 타인의 원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내가 나서서 그 앞에 잘못을 고백하고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릇되이 행한 데에서 형성된 원망이기에 그 실마리가 나에게 있는 것이지요.
먼저 다른 누군가의 원한을 야기시키는 나의 죄악이 멈춰야 합니다. 바보와 멍청이라는 것도 같은 노선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바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최고의회에 넘겨지지는 않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스스로를 일컬어 '바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단어를 다른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바보로 불러서 그의 명예를 침해하고 나의 악한 의도를 그에게 덮씌우려고 할 때에 '최고 의회'에 넘겨지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멍청이'라고 불러서 그가 하려는 좋은 일을 파묻어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부정적인 시야를 갖게 하려고 노력할 때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속에서 어둠을 형성하는 이는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는 커녕 재판을 받고 '감옥' 즉 영적인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형성해 낸 증오의 빚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영혼의 어두움을 남김없이 털어 내어야 비로소 거기에서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런 우리의 상황을 직시하고 지금 이 세상에서 털어낼 수 있는 것을 털어내고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순수하게 하는 길이고 그 길이 바로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진정한 길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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