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저 역시도 가졌던 질문입니다. 2000년 전의 사건과 지금의 내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길래 예수님이 지금의 우리의 죄마저도 짊어졌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의 핵심이었지요.
과연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무슨 상관이 있어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2000년 전에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 같은 일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개념입니다. 누차 설명한 바가 있지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다시 설명하면 시간은 흐르는 시간과 농도의 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강에 물이 꾸준히 흐르지만 그 안에 고기떼가 움직일 때에 그냥 강물만 있는 것은 물일 뿐이고, 그 안에 고기가 가득 든 것은 고기가 가득찬 물이 되겠지요. 다른 비유로 봄에서 가을까지 흐르는 것은 시간이지만 열매가 익는 시간은 때가 차야 익게 됩니다. 이 때가 차는 순간이 보다 더 중요한 시간인 셈이지요.
처음으로 확실해 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은 바로 이 때가 찬 순간에 역사 안으로 다가오신 분이시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예수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과연 예수님은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기본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늘 두 가지 극변 사이에 존재합니다. ‘선과 악’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선과 악은 단순히 계명의 준수 여부에 달린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차원에서 선과 악은 하느님을 향하는가 아니면 반대 방향을 향하는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중립 상태에서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방향을 바라보게 되지요.
그 최초의 경향을 ‘원죄’라고 하고 이는 첫 인간의 첫 배반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중립의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경향에다 자신의 의지를 더해 ‘죄’를 짓게 되지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없앤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는 방향을 심어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물론 세례 뒤에 어떤 삶의 방식을 지니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지요. 세례를 받았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라 세례로부터 겨우 시작되는 것일 뿐이니까요. 아이에게 유아세례만 주고 그 어떤 가정기도도 바치지 않는 부모는 아이를 반대 방향, 즉 죄의 경향에 방치하는 셈이 되고 결국 그 아이는 원죄를 지녔을 때보다 더 지독한 상태로 남겨지게 됩니다.
인간은 전반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경향은 세상 속에 일종의 흐름을 낳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기보다는 점차로 사회화되면서 하나의 큰 흐름을 양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더욱 그 안으로 끌어들이지요. 누군가 이유없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면 우리 마음 안이 어두워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처럼 모든 죄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이런 방향성이 극심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지요. 이런 세상의 기울어짐 속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지키는 방법이라고는 홀로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은수생활을 하며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요. 세례자 요한의 삶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 ‘속죄양’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지요. 인간의 모든 어둠의 방향을 홀로 짊어지고 그 전체 방향을 뒤바꾸러 오신 셈입니다. 인간의 사악한 죄악성은 인간이 되어 오신 창조주와 더불어 죽어 버리게 되지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분은 인간의 죄를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함께 죽음에 집어 넣어 버리신 셈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세상 안에 죄의 경향은 존재하며 각자의 인간은 죄를 짓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매번 우리의 죄 앞에서 ‘구원자’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죄를 해소할 가장 강력한 수단을 지니게 된 것이지요.
이 두번째 설명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간편한 열쇠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간편함을 세상적인 ‘편리함’과 착각하면 안됩니다. 마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무인 자동차가 나를 목적지까지 이끌어주리라고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열쇠를 쓰기 위해서 우리의 의지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갖 죄를 짓고 여전히 사악함 속에 살면서도 단순히 ‘요식행위’를 했다고 안전하다고 착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사항은, 예수님은 전에도 계셨고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2000년 전에 이 땅에 맞이했지만 사실 그분은 시간을 넘어서서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라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지하기에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한 셈이지요. 우리는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니까요.
이런 난해한 설명으로 이해는 될 수 있겠으나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인지하기에는 우리의 많은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체험,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과 그 실패의 체험이 필요하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의 도움을 실질적으로 얻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도움을 주시러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손에 간절히 매달리기까지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려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무슨 상관이 있어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2000년 전에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 같은 일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개념입니다. 누차 설명한 바가 있지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다시 설명하면 시간은 흐르는 시간과 농도의 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강에 물이 꾸준히 흐르지만 그 안에 고기떼가 움직일 때에 그냥 강물만 있는 것은 물일 뿐이고, 그 안에 고기가 가득 든 것은 고기가 가득찬 물이 되겠지요. 다른 비유로 봄에서 가을까지 흐르는 것은 시간이지만 열매가 익는 시간은 때가 차야 익게 됩니다. 이 때가 차는 순간이 보다 더 중요한 시간인 셈이지요.
처음으로 확실해 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은 바로 이 때가 찬 순간에 역사 안으로 다가오신 분이시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예수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과연 예수님은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기본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늘 두 가지 극변 사이에 존재합니다. ‘선과 악’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선과 악은 단순히 계명의 준수 여부에 달린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차원에서 선과 악은 하느님을 향하는가 아니면 반대 방향을 향하는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중립 상태에서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방향을 바라보게 되지요.
그 최초의 경향을 ‘원죄’라고 하고 이는 첫 인간의 첫 배반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중립의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경향에다 자신의 의지를 더해 ‘죄’를 짓게 되지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없앤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는 방향을 심어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물론 세례 뒤에 어떤 삶의 방식을 지니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지요. 세례를 받았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라 세례로부터 겨우 시작되는 것일 뿐이니까요. 아이에게 유아세례만 주고 그 어떤 가정기도도 바치지 않는 부모는 아이를 반대 방향, 즉 죄의 경향에 방치하는 셈이 되고 결국 그 아이는 원죄를 지녔을 때보다 더 지독한 상태로 남겨지게 됩니다.
인간은 전반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경향은 세상 속에 일종의 흐름을 낳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기보다는 점차로 사회화되면서 하나의 큰 흐름을 양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더욱 그 안으로 끌어들이지요. 누군가 이유없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면 우리 마음 안이 어두워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처럼 모든 죄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이런 방향성이 극심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지요. 이런 세상의 기울어짐 속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지키는 방법이라고는 홀로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은수생활을 하며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요. 세례자 요한의 삶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 ‘속죄양’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지요. 인간의 모든 어둠의 방향을 홀로 짊어지고 그 전체 방향을 뒤바꾸러 오신 셈입니다. 인간의 사악한 죄악성은 인간이 되어 오신 창조주와 더불어 죽어 버리게 되지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분은 인간의 죄를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함께 죽음에 집어 넣어 버리신 셈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세상 안에 죄의 경향은 존재하며 각자의 인간은 죄를 짓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매번 우리의 죄 앞에서 ‘구원자’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죄를 해소할 가장 강력한 수단을 지니게 된 것이지요.
이 두번째 설명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간편한 열쇠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간편함을 세상적인 ‘편리함’과 착각하면 안됩니다. 마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무인 자동차가 나를 목적지까지 이끌어주리라고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열쇠를 쓰기 위해서 우리의 의지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갖 죄를 짓고 여전히 사악함 속에 살면서도 단순히 ‘요식행위’를 했다고 안전하다고 착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사항은, 예수님은 전에도 계셨고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2000년 전에 이 땅에 맞이했지만 사실 그분은 시간을 넘어서서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라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지하기에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한 셈이지요. 우리는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니까요.
이런 난해한 설명으로 이해는 될 수 있겠으나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인지하기에는 우리의 많은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체험,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과 그 실패의 체험이 필요하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의 도움을 실질적으로 얻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도움을 주시러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손에 간절히 매달리기까지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려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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