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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지 못하는 이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0,6)

우리라고 깨닫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여전히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자들의 삶은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은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무언가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즉, 내 안에 증오가 일어나는 마음을 어찌해볼 생각은 않은 채로 상대가 바뀌기를 바랄 뿐이지요.

예수님의 우리의 목자라는 말, 그분이 우리의 문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뭔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느끼고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분이 문이라고 해놓고는 전혀 엉뚱한 문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나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보호막 속에 자라온 순진한 사제라서 세상의 현실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머물고 있는 곳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 안에서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느 환경에서든지 적응해서 살기 마련이고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놓치면 안된다고 말이지요.

돈이 많건, 돈이 적건 증오하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누군가는 주택에서 증오하고, 누군가는 초가집에서 증오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내면의 움직임은 겉모습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이야기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돈이 많으면 나름 배우는 게 많아서 더 교양있게 살 수 있고 천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무엇을 배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정말 배운 이들이 지성과 교양을 올바르게 갖춘다면 그들은 보다 내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배운 이들이 더욱 교만에 사로잡혀 아주 작은 성가심도 견뎌내지 못하는 경우를 더 많이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없어서 배우지 못한 이들이 실제적인 삶 안에서 서로 부딪혀 가면서 서로를 견뎌내고 참아내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실 수 밖에 없습니다. 비유가 아니고서는 설명해 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문이라는 표현을 그런 비유가 아니고서는 지상의 언어로 표현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비유 자체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오류들을 양산해 내곤 하지요.

결국 이 문제는, 단순히 지성이 부족해서 깨닫지 못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깨달으려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요. 이미 내리막길을 향해 속도가 붙은 수레를 애써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이 가리키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서서히 달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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