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출생에서 죽음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일어나는 삶의 여러가지 정황들입니다. 인간에게 불확실한 것은 출생 이전과 죽음 이후입니다. 그리고 삶의 여러가지 것들도 실은 불확실한 것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확실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보이는 선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것이 ‘현세’라고 불리는 것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입니다. 인간은 현세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려는 강렬한 욕구 때문에 현세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유통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바로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이지요. 미모를 추구하는 이유도 그것이 곧 명예와 권력에 연관되고 그로 인해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단정하고 고운 모습이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만족시키는 과한 미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형이 성행하고 값비싼 메이커 화장품들이 더 잘 팔리게 됩니다. 건강을 추구하는 이유도 하느님의 뜻에 맞게 봉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벌어놓은 것을 잘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추구하는 건강은 ‘과도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건강을 찾는 것이 보통이지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 확실한 것들 안에서 바라보는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모의 씨앗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알지만 우리 안에 그 씨앗과는 동떨어진 어떤 존재, 영혼이라는 것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계산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보다 더 복잡미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이라는 현상은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것입니다. 누군가는 정말 오래 살고 싶어하는데 일찍 떠나버리고, 누군가는 제 명을 다한 것 같은데도 생명을 유지하고, 결정적으로 그 누구도 자신이 정한 때에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은 갖지만 그것을 설명할 사람을 이 땅의 살아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만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여러가지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러 경험을 축적한 ‘지혜’를 잔뜩 쌓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듣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가장 큰 줄기가 갈리는 셈입니다. 인간들 사이에도 일종의 ‘도’가 있어서 서로 불편함을 느끼면 그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법’을 형성하지요. 헌데 위에서 오는 지혜를 듣는 이들은 전혀 엉뚱한 말들을 해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이고 ‘전능하신 분’에 대한 말이지요. 즉, 인간들이 이 땅에서 서로 맞부딪히면서 배운 지혜와는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말을 단순한 ‘기현상’ 또는 ‘종교적 현상의 일종’으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영혼이라는 것이 정말 생각처럼 단순히 그 어떤 주인도 없이 형성된 에너지 파장 운동에 불과한 것일까요? 세상은 정말 ‘에너지’인 것일 뿐일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까지 생각해 보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자기가 태어난 상황에 따라서 부모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체험하고 그 뒤에 어른이 되어 그것을 유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셈이지요. 가톨릭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며 불교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다 그 신앙을 온전히 이어받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앞에 겸손되이 고개를 숙이는 한 인간이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의 나약성을 올바로 바라보고 그 한계성을 절실히 체험하며 영원을 약속하는 존재를 신뢰하는 한 인간이지요. 그리고 그 인간이 여러분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다고 말이지요.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우리를 다시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려고 하신다고 나날이 외치고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가 아니니까요. 저마다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루하루 세속의 사정에 더욱 익숙해져 가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갈수록 더욱 공허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직도 숱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반성하는 시간이라도 가졌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바쁜 나머지 이런 종류의 긴 글은 읽어볼 시간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몇시간이고 공을 들여 물건을 선택하면서 말이지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