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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는가?



세상은 '착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생각입니다. 착하면 다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올바른 분별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착함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착하기를 바라지만 그 착하다는 의미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헌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진정으로 올바른 길을 지도한다면 이는 마땅히 순명이라는 가치를 키워 나가야 하겠지만, 만일 부모가 자신의 개인적인 야욕을 자녀를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면, 자신이 젊은 시절에 못다한 것을 자녀를 통해서 '대리만족' 하려고 한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과연 이 '순종'이라는 것이 마냥 통용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순종하고 있는 자녀가 마냥 '착한' 자녀가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2차대전 당시 수많은 나치의 장교들은 순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한 대상은 안타깝게도 '올바름'이 아닌 사람들 욕구의 집합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후 전쟁 범죄자라는 악당으로 취급되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착하다'는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고 따라서 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주장하는 이렇게 될 때에 '착한 것이다'는 주장은 조금만 길을 벗어나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명하면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에게는 '길'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착함마저도 이 '길'에 비추어서 그것이 바른 착함인지 아니면 그릇된 착각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가장 완전한 선,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를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든 방향은 틀어질 수 있고 엇나갈 수 있으며 심지어는 타인에게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만의 제국의 선을 위해서 애를 쓴 것이고 그것이 다른 나라에게는 지옥이 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의 손길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은 모든 것은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정치라는 틀을 두고 대립하는 두 세력은 어떨까요? 과연 어디에 진실이 있고 선이 있는 것일까요? 악마는 '사실'을 두고 싸웁니다. 사실에 기초해서 조금만 비틀어진 내적 경향은 상대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 '정치'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을 이겨야 내가 힘을 얻기 때문에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하는 공방전'이 벌어지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정치에서는 사람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선거에 필요한 표가 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서로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것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표가 오니까요. 그래서 곧잘 일어나는 것이 '선동'이라는 작업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깊이 뚫어보기 힘든 이에게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사고는 사람을 쉽게 선동할 수 있게 됩니다. 과거 우리나라에 툭하면 포스터 그리기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무대가 SNS로 바뀐 것 뿐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올라오는 '내 구미에 맞는 게시글'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세뇌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옵니다.


선은 오직 하느님이라는 분, 즉 가장 완전한 선이라고 할 수 있는 분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선을 바탕으로 우리가 가진 선을 신중히 바라보고 수정해 나갈 때에 우리는 '보다 더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그것을 보충해야 하고, 선한 실천이 부족하면 실천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우리가 서로 물어뜯고 싸우기만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셨으니까요. 그리고 어둠의 세력이야말로 우리의 분노와 증오, 원한과 싸움을 너무나도 즐길 것이 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저 고요한 성전에 들어앉아서 묵주나 돌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즉 진정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선이 아닌 영역'과 항상 대면하고 싸워 이겨 나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내 주변의 영역에 선을 펼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선을 펼치는 데 왜 용기가 필요하겠느냐고 물으시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선하지 못하고 따라서 선을 펼치면 그들은 그것을 반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착함'이라는 말에 저는 동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앞에 두고 바라빠를 죽이라고 한 그 군중들이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선동당한 이들은 자신이 외치는 구호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옆사람도 그렇게 하니까 나도 하는 것 뿐입니다. 옆사람이 얼음물을 뒤집어쓰니까 나도 뒤집어 쓸 뿐입니다. 릴레이로 무언가를 한다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걱정되니까 하는 것 뿐입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고민해 본적 없는 사안일텐데 말이지요. 그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위선'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길을 잃고 선동당해 버릴 것입니다. 어느 색깔에 빠지게 되면 모든 것이 붉어 보이든지 모든 것이 파래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만물 속에 다양함을 그리고 그 다양성 속에 일치와 조화를 이루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오직 하느님을 올바로 알 때 진정으로 선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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