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유럽의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꾸짖을 마음을 자주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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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데에 수많은 학적 연구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적 발전은 교리의 정리와 그릇된 사상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지만 복음이 전해지는 데에는 보다 단순하고 실천적인 요소들이 더 중요하다. 문제는 그 사상에 집중하느라 실천적인 복음 선포를 소홀히 하는 데에 있다.
오늘날 복음은 전해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어디에서 복음은 정체되고 있는가? 배움이 부족해서 그러한 것일까? 아직도 우리는 '더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한국만큼 문맹이 퇴치된 곳은 없다. 민족적으로 따지자면 우리만큼 우수한 학적 배경을 가진 민족은 없다. 그렇다면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못 배워서'가 아니다. 전혀 다른 곳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복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용서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한국땅에 있어서 복음 선포에 가장 장애물이 되는 것은 지나친 형식화와 지식의 찬양이다. 신앙에 있어서 전문가는 수십권의 두꺼운 책을 책장에 꽂아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진정한 전문가이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을 찾지만 그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다. 저는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학적인 내용을 아무리 가르쳐봐야 소용이 없다. 복음은 선포되어야 복음이 되는 것이다. 기쁜 소식은 전해져야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내가 머무르는 가정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복음은 우리 각자가 지닌 달란트대로 전해져야 한다. 당신이 사제라면 신자들에게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해야 하고, 당신이 가정의 가장이라면 그 가정을 복음화해야 한다.
결국 '신앙의 게으름'이 '열매 맺지 못함'이라는 결과로 드러난다. 신자 수는 자꾸만 줄고, 신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준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뉴스 기사들이 관심거리가 되고 언제나 쏟아져나오는 새로운 상품들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가 있어 그 관심을 하느님에게로 돌리려 노력할 것인가? 그 책임은 언제나 '타인'에게 전가된다. 신부님의 몫이라고, 교회의 몫이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가 아니란 말인가? 우리 스스로 하느님의 백성의 대열에서 제외 시키는 것인가? 누가 하느님의 손가락의 역할을 맡을 것인가?
개인적인 신앙관에 빠져서 그저 미사나 빠지지 않으면 구원 받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적지 않은 신앙인들, 훗날 그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자신이 그래도 그나마 열심히 해 왔다고 생각한 것에서 그 어떤 결실도 맺어지지 않았기에 약속된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스스로의 현실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수도 없이 들었으면서도 몰랐다고 항변해봐야 소용이 없다. 복음은 '실천'되고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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